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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당 Sep 09. 2018

어제(어쩌다보니제주도) - 프롤로그

어쩌다보니 제주도로 왔다. 아예.

그날이오고야말았다.

여행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었습니다.

군 전역 이후 처음으로 여행다운 여행을 떠나봤었다. 제주도로.

사실 제주도를 가고 싶었다기보다는 한 번도 타지 못했던 비행기를 타보고 싶었다.

당시 저가항공이 나오면서 제주도 왕복 항공권이 저렴하게 나오던 시기였습니다.


비행기가 구름을 뚫고 제주공항에 착륙했을 때 그 기분.

무계획을 계획하고 내려와 제주도 구도심 주변을 돌아다녔을 때 그 느낌.

그러다 마주친 탑동 방파제의 멋졌던 노을.

성산일출봉에서 내려다본 바다.

주인도 없이 혼자 썼던 모슬포항 어느 게스트하우스. 그 근처 "자존심식당"에서 먹었던 김치찌개.

구름 사이로 비친 햇빛이 내려진 마라도 앞바다.

내 인생 첫 번째 여행. 첫 번째 제주도는 제주에 대한 로망을 안겨주었었습니다.


그 뒤로 매년 휴가는 제주도로 떠났던 것 같습니다.


언제나 제주도의 시작과 끝은 탑동방파제였다.


힘들었습니다.

스타트업. 그것도 아무것도 갖추어지지 않은 초기 스타트업 회사를 3곳이나 거쳤습니다.

정해지지 않은 룰, 과도한 업무, 언제나 퇴근은 택시로.

휴가도 제대로 쓸 수 없어 여름휴가는 언제나 11월이나 12월에.


힘들었지만 그때마다 제주도를 꿈꾸며 참고 참았습니다.

그렇게 온 제주도는 디테일하고 촘촘하게 일정을 잡아 구경을 한다거나 관광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루에 한 번 정도 점찍어 둔 카페를 다녀온다던가 맛있는 음식점을 다녀오는 정도였고

나머지는 숙소 주변에서 바다를 보면서 멍을 때리는 힐링의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문득 제주도에서 살아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서른 직전에 제주도를 다녀온 뒤 썼던 글


서른 직전에 떠난 여행에서

제주도에서 살아보자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새해 신년의 지키지 못할 작심삼일용 다짐 같은 그 생각.

막연히 2-3년 뒤에 떠나볼까?라는 정도였습니다.


누구나 꿈꿀 수 있는

"제주도에서 살아보자", 

"제주도에서 카페나 해볼까?", 

"매일 바다나 보면서 살고 싶다"

라는 정도의 실현 가능성 제로의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러다 이전 회사에서 많은 도움을 주셨던 아는 대표님의 소개로

제주도의 어느 멋진 카페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다가온 기회에 흔들렸지만

꿈으로만 생각하던 일과 장소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떠나보낼 수 없었습니다.


제주도에서의 2번의 미팅 이후 제주도 입도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당일치기 제주도도 가능 했었다. 오후에 강풍주의보가 발효되어 바로 올라왔었다.

또 다른 시작은 또 다른 이별이 있었습니다.

가족과의 이별.

다니던 회사와의 이별.

도시와의 이별.

친구들과의 이별.

꿈꾸던 제주 라이프가 시작되기로 했는데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


생각해보면 서울에서 부산을 왔다 갔다 하는 것보다

시간적으로는 더 빠르게 다닐 수 있건만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산다고 하니

뭔가 더 멀게 느껴졌습니다. (실제로 거리 상 더 멀긴 합니다만) 


떠나는 것이 아쉬운 마음에 

집에 티비도 바꿔주고 화장실에 미끄럼 방지패드도 깔아줬습니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들도 만났습니다.

친구들은 꿈꾸던 제주도를 가게 돼서 좋겠다며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

군대 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사촌동생이 병장이 됐다고 해서

미루고 미루던 남원으로 면회도 다녀왔습니다.


의외로 KTX를 타면 빨리 갈 수 있었던 남원


어쩌다보니 어머니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져

제주에 오기 전 어머니와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같이 쇼핑을 가거나 맛있는 밥을 먹었습니다.


하루하루 제주에 가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 없이 가족은 잘 지낼 수 있을지. 제주도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얼마 전에 제주도 태풍이 크게 왔던데 날씨는 괜찮을지 등등

제주도에 가는 날이 가까워져 오면서 오만가지 생각이 저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키티 목이 꺽일만큼 태풍이 불었던 제주도...


31살. 독립입니다.

언젠간 집에서 나와 나만의 인생을 살아야 했었습니다.

서른이 넘어가며 독립을 생각한 적은 있지만

뭔가 예상치도 못하게 너무 빠르게 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너무 먼 제주도.

그래서 그런지,

저도 어머니도 날짜가 가까워오며 어머니와 저는 조금 말이 없어졌습니다.


8월 31일 금요일.

제주도 가는 날.

일부러 저녁 비행기를 잡았습니다.

조금 더 어머니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공항버스를 타는 곳에 어머니와 같이 나왔습니다.

조금 시간이 남아 커피를 마시며 했던 이런저런 이야기들.

그리고 떠나야 하는 시간.

그렇게 날씨 좋은 날 제주도로 떠났습니다.

금요일, 그것도 오후 3시 30분 버스를 타고 갔는데 차가 밀려서 제시간에 못탈까 걱정했었다.


그렇게 김포공항에서 제주도행 비행기를 탔고.

이제서야 뭔가 떠나는 느낌이 팍 들었던 김포공항 게이트.

그렇게 제주도에 도착했습니다.

왔다왔다왔다.제주도를진짜오고야말았다.


어쩌다보니 제주도에 왔습니다.


그렇게 제주도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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