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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리킴 Nov 30. 2015

부장님 저 임신했습니다

혼전임신, 상사에게 말해야만했다.


역시나.

부모님의 반응은 생각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찢어질듯 비명을 지르시며 주저앉아 우시는 엄마와 무자비하게 휘두르시는 아빠의 발길질 속에서 난 내가 감당해야 할 무게와 치명적인 상처를 느껴야 했다.


두분이 내게 거는 기대는 여느 부모님들과 다르지 않았다. 자식을 위해 모진 고생을 굳건히 이겨내셨고 이미 쪼그라들고 있는 양손엔 거뭇거뭇한 검버섯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지독한 절규만이 집안에 울려퍼졌다. 처음으로, 콱 뛰어내리고 싶다고 말하며 우시는 아빠의 등을 방문 틈으로 엿보았다.


아무런 희망이 없어보였다.

감히 아버님이라 부르며 발을 디딘 남자친구는 굳센 손에 뺨을 한대 맞고 쫒겨나야했다.


우리는 명백한 죄인이었다.





이틀 후부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음울함과 끔찍하리만치 깊은 상심이 감도는 집에서 나역시도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이리라. 


며칠 전과 별반 다를바 없던 세상이 전혀 달라보였다. 모두가 행복해보였고, 회사는 더욱 활기가 넘쳤다. 마치 세상의 모든 난제는 내가 다 끌어안고있는 사람처럼 나 홀로 시체 썩는내를 풍겨댔다.


입덧이 시작되었다. 

회사 화장실에서 숨죽여 구토를 반복하고 변기를 끌어안은채 눈물과 콧물과 뒤섞인 시큼한 액체를 질질 흘리며 점점 불러올 배를 떠올렸다.


하지만

6명으로 구성되어있던 당시 나의 부서는 나를 제외한 모두가 남자였다.


도저히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일은 며칠 지나지 않아 터졌다.


업무를 보던 중, 아래가 뜨끈해지는듯 싶더니 무언가 점점 속옷을 적셔갔다. 사색이 되어 화장실로 뛰어간 내 눈에 새빨간 피가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리는게 보였다. 이미 속옷은 흠뻑 젖어있었다.


심장이 귓가에서 뛰는듯 쿵쾅댔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절규하며 지갑을 든채 무작정 회사를 뛰쳐나왔다. 그 날따라 어찌나 택시가 안잡히던지, 차도로 반쯤 뛰어들어 정신나간 여자마냥 손을 휘적거렸다.


근처 산부인과로 가달라고 급히 얘기한 뒤 어느때보다도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여전히 피가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직 주수가 적어 질초음파로 봐야해요.


M자형 의자에 나를 앉히며 젊은 여의사가 간호사를 불렀다. 잔뜩 주름진 60년대 몸빼치마같은 무언가로 갈아입고 의자에 오르자마자 붉은피와 응고된 덩어리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여의사가 어두운 표정으로 초음파 기계에 젤을 바르며 '출혈이 심하네' 라고 하는걸 듣자 머리속이 아득해졌다.





다행히 아기의 심장은 여전히 규칙적으로 뛰고있었다. 자궁이 팽창되며 터졌던 미세혈관에서 고인 피가 한꺼번에 떨어져 나온거라 말했다.



나는 더이상 임신 소식을 미룰 수 없다는걸 알았다. 주렁주렁 뱀처럼 길게 이어붙은 초음파 사진을 안주머니에 꼬옥 챙겨넣고 회사로 돌아왔다.




-부장님, 저 임신했습니다



신정이 지나고 마흔에 접어든 부장님은 뭐? 라고 되묻지도 못하고는 나를 멀건 눈으로 쳐다보셨다. 사내 카페에 상사를 불러내어 할 얘기라면, 퇴사얘기뿐이던데...하고 웃으시던 직후였다.


얼마나 발칙해보였을까.

얼마나 천박해보였을까.


고작 입사 몇년 되지 않은 사원 나부랭이가, 그것도 결혼도 하지않은 처녀가, 새남자친구가 생겼다고 자랑한지 몇달도 채 되지 않은 여자가 눈을 똑바로 뜨고 임신이란 단어를 입에 담고 있었으니.


그역시 두 아이를 둔 아버지였고, 아마 그 순간 사랑스런 딸을 떠올리며, 이렇게는 키우지말아야지 잠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해도 어쩔 수 없다. 맞는 소리니까.


-축하해야할지 어째야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축하해. 그래, 이제 어떻게 하려고?


어떻게 하려고? 그 질문이 뱅뱅 맴돌며 머리속을 난잡하게 헤집어댔다. 혼인신고부터 하고 신혼집 알아볼거라고, 곧 배가 나올테니 어차피 알게될거 그냥 자진납세 하고싶었다고, 또박또박 말하는 내가 참으로 한심해보였을 것이다.


소문으로 퍼지길 원치 않았다. 가십거리가 될 거라면 내 스스로 알리고 싶었다.


다음날 인사팀, 입사동기, 팀원들에게 임신사실을 모두 알렸고, 한동안 나는 눈빛으로 수근대는 사람들 속에서 헛구역질을 속으로 삼켜야했다.




한가지 알게된 사실이 있다면,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에게 훨씬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웅성거림은 얼마 가지 않았다.

나는 그저 재밌는 에피소드 하나를 제공해준 사원 나부랭이였고, 회사는 여전히 바빴으며 그들에겐 나보다 모니터 속 매출수치가 훨씬 중요했다.


내 세상이 하루 아침에 돌변하였대도, 그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저 밤바다를 비추던 등대가 한번 깜빡였을 뿐이었다.



고마운 무관심 덕분에 나는 우리 아기를 적어도 회사에서만은 눈치보지 않고 어루만질 수 있었다.


뭔가 싶겠지만 엄마는 알아볼 수 있는 뚜렷한 두상의 형체. 작은 귀와 눈동자, 아빠를 닮은 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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