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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규 Mar 25. 2022

열아홉 살 장소현, 영락없이 엄마였다

검은색 단발머리를 연신 만지며 걸어오는 모습이 영락없이 열아홉 살이었다. 투명 유리 현관문을 밀고 들어오면서 하얀 이를 드러내 웃을 땐 더 어려 보였다. 


장소현(가명) 씨는 오른손으로 배를 감싸면서 테이블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펑퍼짐한 상의에 가려진 임신 9개월의 배가 그제서야 드러났다. 


십대의 얼굴과 출산을 앞둔 둥근 배, 익숙하지 않은 모습 앞에서 나는 허둥댔다. 얼굴을 보는 눈이 나도 모르게 자꾸 배 쪽으로 떨어졌다. 어색함을 감추려 허공을 보면서 말했다. 


“곧 출산 예정이라고 들었는데.. 진짜 어려 보이네요.”

“당연하죠. 열아홉 살이니까요.”


사실 의자에 앉으며 오른손으로 배를 만지지 전까지 그녀가 임신부라는 걸 알아채기 어려웠다. 마른 체형과 큰 상의 때문에 더 그랬다. 


“출산 예정일이 언제인가요?”

“열흘 정도 남았어요.”


장소현 씨는 약 열흘 뒤면 엄마가 된다. 출산 후 산부인과에서 퇴원해 아이와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은 딱 일주일. 이 숙려기간을 마치면 아이를 입양 보내기로 했다. 장소현 씨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 한 말이다. 약 일주일 간격으로 삶의 큰 물줄기가 급격히 방향을 트는 숨 가쁜 시간. 


“소현씨, 아이 보내기 전에 다시 만나서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2주일 뒤인 3월 중순께, 우린 서울의 한 미혼모 공동생활시설에서 다시 만났다. 장소현 씨의 배는 홀쭉해졌다. 그녀는 아들을 낳은 엄마가 돼 있었다. 

“열심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요. 담담하게 보내야죠. 좋은 곳으로.. 되도록 멀리.”


엄마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멀리, 한국이 아닌 곳으로 보내기로 했다. 외국으로 입양, 한국에서 고작(?) 19년 살았지만 이유는 분명했다. 


“우리나라 어떤지 잘 아시잖아요. (웃음) 아이도, 미혼모도 살기 힘들 곳이잖아요.”


강하게 보이려는 건지, 엄마는 원래 강한지,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미혼모가 살기 힘든 사회 한국, 장소현 씨는 어떻게 미성년 미혼모가 됐을까. 왜 입양을 선택했을까. 


장 씨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지만, 법조인 엄마 덕에 장 씨와 남동생은 어렵지 않게 자랐다. 그녀는 임신 27주가 될 때까지 임신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녀의 엄마도 마찬가지다. 


수능을 앞둔 고3의 어느 날, 스트레스 때문이지 생리가 불규칙해졌다. 몸이 무거워지고 배가 조금씩 나온 것도, 가끔 구역질을 하는 것도, 모두 수능 탓으로 돌렸다. 드디어 수능이 끝났다. 그런데도 몸은 계속 이상했다. 문득, 지난 여름에 있었던 남자친구와의 성관계가 떠올랐다. 당시 분명히 피임을 했기에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뭔가 잘못됐다는 걸 확신했다. 갑자기 겁이 났다. 그날 저녁 혼자 산부인과를 찾아갔다. 야간 당직을 하던 남자 의사가 진단을 했다. 임신이었다. 그것도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27주차. 


태어나 자기 발로 처음 찾은 산부인과.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 미혼모는 어떤 대접을 받는지, 앞으로 자기 삶은 어떻게 될지, 그날 그 산부인과에서 어렴풋이 깨달았다. 의사는 “너무 걱정하지 말고, 부모님과 상의해 내일 꼭 같이 오라”고 친절히 말했는데, 정작 나이 많은 여자 간호사가 난리였다. 


“얘야, 너 왜 그랬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거야! 너 앞으로 어쩌려고 그래?”


그러자 의사가 버럭 화를 냈다. 


“애한테 왜 그러세요!”

“애가 애를 뱄으니까 그렇죠. 그것도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의사와 간호사는 열아홉 살 임신부를 앞에 두고 애들처럼 목소리 높여 싸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애한테 그렇게 심한 말을 합니까?”

“애니까 더 걱정돼서 그러는 거예요!”

“아이 참.. 그만 하세요. 얘한테 산모수첩 만들어 주고 필요한 거 알려주세요.”


적과 아군이 불분명한, 누가 누구를 편 드는지 헷갈리는 싸움. 철없는 아이 취급하는 건 양쪽이 마찬가지여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마지막에 간호사가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근데, 얘야 너 돈은 갖고 왔니? 병원비 있어?”


다행히 장 씨에겐 돈이 있었다. 그래서 병원 한 번 가보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화장실에서 애를 낳고 유기하는 또래의 일부 미혼모 처지는 면할 수 있었다. 


집에 돌아가 의사 선생님의 말대로 모든 걸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집에 둘 외에 아무도 없는데도, 엄마는 오른손 검지 손가락을 펴서 자기 입에 댔다. 


“쉿, 조용히 말해. 소현아, 네가 지금 말한 거 너랑 엄마랑 둘만 아는 거야. 알았지? 죽을 때까지 그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돼. 동생은 물론이고 친구, 친척에게도.”


엄마는 여자의 삶을, 미성년 미혼모가 이 땅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잘 안다. 그래서 우선 입 단속부터 했다. 엄마가 아니라 사회가 침묵을 강요한 것일 수도 있다. 엄마는 길 하나는 열어줬다. 남자친구와 그쪽 부모님에겐 알리기로 말이다. 남자친구는 김소현 씨보다 두 살 많은 대학생이었다. 


다음날, 아침부터 겨울비가 내렸다. 남자친구, 남자친구의 엄마와 함께 어제와 다른 산부인과에 갔다. 따뜻한 위로를 기대했으나, 남자친구는 겨울비처럼 차가웠다. 산부인과 대기실에 앉아 있는 동안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깊고 길어질수록 사람들의 눈길이 장소현 씨에게 쏠렸다. 


“병원에 있는 다른 분들은 다 나이가 많은데 저만 어리니까, 다들 몰래 흘끗 저를 보는 거예요. 남녀 같이 오신 분들은 서로 축하하고 격려하는 분위기인데, 우리만 심각하게 있으니까 더 이상하게 보는 거죠. ‘아, 저 여자애 사고쳤구나’ 그런 시선과 수근거림. 그게 참 견디기 힘들었어요.”


이 산부인과에서 받은 ‘특별한 시선’은 미래를 암시했다. 청소년인 자신의 부풀어 오른 배와, 출산-육아를 이 세상이 어떻게 바라볼지 말이다. 


이 병원에서도 임신을 진단했다. 남자친구와 그의 엄마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했다. “축하한다”는 말도, “너무 걱정하지 말자” “힘들겠구나” “같이 고민해 보자” 같은 위로의 말도 하지 않았다. 셋은 겨울비를 맞으며 병원 근처 카페로 갔다. 남자친구 엄마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뱃속 아이, 우리 OO이 아이 맞니?”


놀라 입이 벌어졌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눈물이 쏟아졌다. 눈물을 훔치며 남자친구를 바라봤다. 대학생 남자친구는 눈을 돌렸다. 배려인지 무시인지, 장씨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두 사람은 말없이 기다렸다. 눈물이 멈추자 남자친구와 그의 엄마는 산수를 하기 시작했다. 


“저에게 배란일이 언제냐부터 시작해서, 성관계 한 날짜랑 임신 기간을 맞춰보는 거예요. 너무 황당했는데, 지금은 그냥 이해하려 노력해요. 남자친구도 그의 엄마도 많이 놀랐겠죠. 믿기 싫고, 미래가 걱정되고.”


두 사람과 헤어져 집으로 가는 동안 사막을 걷는 것처럼 장 씨의 가슴이 까맣게 탔다. 다음날로 넘어가는 깊은 새벽, 남자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반가웠다. 전화기 너머에게 남자친구가 말했다. 


“소현아, 진짜 내 아이 맞아?”


한시절 따뜻했던 남자친구가 영원히 녹지 않을 빙하처럼 느껴졌다. 그걸로 끝이었다. 울면서 남자친구 전화번호를 지우고, 카카오톡을 차단했다. 2016년 12월은 춥게 지나갔다. 


아이를 낳기로 했다. 낳은 아이를 입양 보내기로 했다. 엄마와 그렇게 약속했다. 엄마는 이 세상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다시 당부했다. 그런 엄마도 괴롭고 힘들어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듯했다. 


2017년 새해가 밝았을 때 장소현씨는 작은 가방을 들고 미혼모공동생활 시설에 입소했다. 출산을 앞둔 미혼 임신부와 아이를 낳은 미혼모가 6개월까지 머물 수 있는 곳이다. 부른 배 때문에 친구를 만날 수도 부를 수도 없었다. 뱃속의 아이를 키우고, 외로움을 견디고, 때로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도 모두 장소현 씨의 몫이었다. 


“제가 엄마고, 여자니까 뱃속의 애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건 당연한데.. 뭐랄까요. 억울하고 상실감이 컸어요. 왜 나 혼자 이 짐을 짊어져야 할까 하는 생각도 들고. 이 사회에서 내가 무슨 죽일 죄를 진 것도 아닌데, 왜 미혼모는 숨어 살아야 하나.. SNS를 보니까 남자친구는 똑같이 살더라고요. 술 마시고, 놀러 다니고,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고..”

가난하고 덜 배우고, 가정 환경이 열악한 사람만 미혼모가 되는 건 아니다.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장씨는 공부도 잘 했다. 장씨는 서울의 모 대학교 인문대학에 합격했다. 세상에서 자기만 버려진 것 같은 우울한 기분이 사라졌다. 


“빨리 아이 낳아 입양 보내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대학생활 하고 싶었어요. 대학 1학년.. 얼마나 재밌겠어요. 미팅도 하고 소개팅도 하고, 술도 마시고.. 다 잊고 새출발 하자 다짐했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날짜가 다가왔다. 장 씨는 펑퍼짐한 외투로 만삯의 배를 가리고 학교에 갔다. 다행히(?) 비가 내려 옷으로 더 몸을 칭칭 감을 수 있었다. 선배들이 무대에서 공연을 하면서 신입생을 맞았다. 행사가 끝나고 선후배 모두 술집으로 향했다. 


장소현 씨만 혼자 발길을 돌려 집도 아닌 시설로 돌아왔다. 그날 밤, 동기들 ‘단체 카톡방’에는 술 마시면서 즐겁게 노는 동기들의 사진이 줄줄이 올라왔다. 어느 때보다 밤이 길게 느껴졌다. 


3월 초 개강을 해 동기들이 학교로 갈 때, 장소현 씨는 병원에 입원했다. 유도분만을 하며 3박4일 동안 병원에서 지냈다.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고통 속에서 사내 아이를 낳았다. 한 간호사가 “역시 애가 애를 낳으니까, 산모와 아이 모두 건강하다”고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을 했다. 


엄마가 병원으로 찾아왔다. 장 씨 품에 안긴 아기를 보고 엄마는 딱 두마디를 했다. 


“귀엽네.. 너 닮았다.”


이 말만 남기고 엄마는 고개를 숙이고 발길을 돌렸다. 돌아선 엄마의 어깨가 흔들렸다. 엄마가 멀어수록 울음소리도 작아졌다. 장소현씨는 아들에게 ‘이 세상에서 하나뿐인 사람’이란 뜻의 이름을 지어줬다. 병원에서 3일을 보내고 퇴원해 아이와 함께 집이 아닌 시설로 돌아왔다. 


이제 딱 일주일, 엄마와 아이에게 운명의 시간이 주어졌다. 입양을 보낼 것인가, 함께 살 것인가. 어린 엄마의 마음은 입양에서 변하지 않았다. 자원봉사자 등 여러 선생님이 조언을 했다. 


“어차피 일주일 뒤면 이별이니, 아이에게 정 주지 마. 젖도 물리지 말고, 가급적 얼굴도 보지 마. 아이 떠나면 네가 힘들어지니까.”

시키는 대로 했다. 정이 들까봐 아이를 자기 옆에 재우지도 않았다. 머리맡에 두고 재웠다.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첫날은 그렇게 보냈다.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모든 게 장소현 씨 뜻대로 되지 않았다. 


“밤에 잠자는 아이 얼굴을 봤는데요. 깜짝 놀랐어요. 뭐랄까요.. 그게.. 있잖아요.. 그게.. 참..”


장 씨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울기 시작했다. 한참 뒤에야 못다한 말을 이어 붙였다. 


“아이가 너무 예쁜 거예요. 저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남자친구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똥을 싸도 더럽지 않고, 밤에 울어도 밉지 않고.. 내가 아이를 좋아하게 되다니.. 제가 엄마를 사랑하고, 남자친구를 사랑하는 것과는 많이 다른 감정이 마음 속에서 자꾸 생기더라고요.”


정 주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는데, 아이를 사랑하게 되다니. 임신 사실을 안 순간보다 그게 더 충격이었다. 마음 복잡한 시간이 시작됐다. 


머리맡의 아이를 조금씩 끌어내려 자기 옆에 재우기 시작했다. 안아주면 안 되는데, 어느 순간 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름을 부르면 안 되는데, 아이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 작게 노래를 불러주고, 손을 만지고 발을 만졌다. 


정 주면 안 되는데 저절로 정이 가고, 사랑하면 안 되는데 자기 멋대로 사랑이 커지는 시간. 입양 대신 직접 키우고 싶다는 생각도 자꾸 커졌다. 아이 옆에 누워 천장을 보면서 혼잣말을 했다. 


“하느님, 저 이제 어떡하죠? 저 아이 보내면 저 어떻게 살죠?”


천장을 보는 눈에서 나온 눈물이 장판을 적셨다. 아이가 잠에서 깰까봐 마음 놓고 울지도 못했다. 일주일 중 나흘이 흘렀을 때 장소현씨에게 물었다. 


/ 입양 보낼 겁니까?

“네.”


/ 키우고 싶다면서요.

“외국에서 살아야 아이가 더 행복할 겁니다. 한국은 차별이 심하잖아요. 청소년 미혼모와 그 자식을 사람 취급이나 하겠어요?”


/ 아이 사진은 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몇 장 찍었어요.”


/ 아이랑 같이 있는 모습, 찍어 줄까요?

“아니요.


/ 왜요?

“나중에 보면 가슴 아플 테니까요.”


/ 아이 훗날 만날 수 있을까요?

“20~30년 뒤, 아이가 성인이 되면 찾아오겠죠. 엄마와 자식의 인연은 질기니까요.”


/ 그 질긴 인연 놓아주고, 긴딜 수 있겠어요? 

“슬퍼도 견뎌야죠.”


어쩌면 강요된 이별과 슬픔인지도 모른다. 여성, 미혼모, 미혼부와 그 아이들을 차별하지 않고 존중하는 사회였다면, 미혼모를 ‘그렇고 그런 여자’ 취급하는 세상이 아니라면, 장소현 씨는 다른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 


뱃속의 아이를 키우고, 이런저런 모욕을 참고, 빙하로 바뀐 남자친구를 떠나보내고, 외로움과 쓸쓸함과 여러 갈등 속에서 일주일을 버틴 것도.. 모두 엄마 혼자였다. 


사흘이 지나 일주일간의 숙려기간이 끝났다. 장소현 씨는 자기 품에 아이를 안고 시설 밖으로 나왔다. 3월 봄볕이 눈부셨다. 거기까지였다. 아이는 잠든 상태로 어디론가 떠났다. 엄마는 “미안하다”고 펑펑 울면서 돌아섰다. 아이와 엄마는 서로 알 길이 없는 각자의 길을 갔다. 


새끼를 보내고 돌아서 우는 모습을 보니, 장소현 씨는 영락없이 엄마였다. 


[2017년 연재하려다 못한 입양 미혼모 이야기다. 아이만큼이나 엄마도 많이 성장했을 것이다. 문득 아이가 생각나는 날, 엄마는 그 하루를 어떻게 견딜지.. 가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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