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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규 Sep 12. 2022

가을볕 쏟아지던 무덤가의 은밀한 김밥

영화 <대부>의 엔딩은 주인공 알파치노가 볕 좋은날, 지난날의 화양연화를 떠올리며 죽는 장면이다. 그때 나오는 곡이 마스카니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간주곡이다. 

다섯 평 남짓한 방에서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내면의 이야기를 하는 게 쉽지 않았다. 내 침묵이 길어질수록 작은 방의 공기는 어색하게 내려앉았다. 책상 너머의 심리상담사는 미소를 지으며 내 이야기를 기다렸다. 


눈이 마주치면 멋쩍게 입꼬리를 올리거나, 심사위원 앞에서 오디션 보는 신인 배우처럼 괜히 목소리 다듬기를 몇 번. ‘내가 왜 내 돈 쓰면서 어색함과 싸워야 할까’하는 생각이 들 때면 이렇게 묻곤 했다.


“오늘은 무슨 말을 할까요?”


상담 초기엔 말 그대로 처음이라서, 주1회 만남이 2~3개월 진행된 이후엔 오히려 상담사가 내 마음을 다 읽는 듯해서 말하는 게 조심스러웠다. 나는 ‘어디까지 말을 할까’를 궁리하고, 상담사는 ‘저 사람이 어느 선까지 말을 해줄까’ 하며 기다리는 밀당의 시간. 


책상 너머의 상담사는 재촉하는 법 없이 낮게 말했다. 


“무슨 말이든 괜찮아요. 지금 떠오르는 이야기를 들려줘도 좋구요.”


통창으로 오전의 봄볕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턱을 긁적이며 창밖 하늘을 바라봤다. 여름 끄트머리, 초가을 하늘처럼 눈이 부셨다. 


“오늘처럼 볕이 좋은 날이었어요….”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차피 이 좁은 공간에서 서로의 역할은 분명했다. 나는 말하는 사람, 상담사는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볕에 이끌려 심리상담실로 소환된 그날은 초등학교 5학년 시절의 가을운동회날이었다. 내가 학년을 정확히 기억하는 이유가 있다. 


엄마, 아버지는 2년 간격으로 2남2녀를 낳았다. 나는 그중 막내다. 우리 형제는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고 졸업했다. 도시와 비교할 수 없는 작은 시골 학교여서 소풍이나 운동회는 전 학년 아이들은 물론이고 온 동네 사람들에게 특별한 이벤트였다. 


내가 5학년에 올라갈 때 작은 누나가 졸업했으니, 형제 중 초등학교에 남은 건 나 하나. 특별한 이벤트는 나만의 몫이 됐다.  


무언가를 잃었거나, 애초 가진 게 없던 아이는 특별한 이벤트 날에 상실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어린 우영우가 아버지에게 “나는 왜 엄마가 없어?”라고 물은 순간은 딱 운동회날, 그것도 점심시간이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아버지는 엄마와 이혼했다. 나는 아버지와, 형과 두 누나는 엄마와 살았다. 봄소풍, 가을소퐁, 가을운동회는 해마다 반복됐으니 김밥을 만들어야 하는 특별 이벤트는 초등학교 6년 동안 열여덟 번 이어졌다.


아버지는 평소 나를 먹이고, 입히고, 재웠지만 이벤트를 책임질 능력까진 없었다. 우영우 아버지처럼 김밥집이라도 했으면 다행일 텐데, 하필이면 아버지는 보신탕집을 운영했다. 야채를 다듬어 데쳐 무치고, 계란을 얇게 부치고, 소고기나 햄을 볶아 찰진 밥에 올려 김에 돌돌 마는 그 디테일한 음식을 아버지는 만들지 못했다. 


“나는 왜 엄마가 없어?”


나는 6년 내내 이런 질문을 아버지에게 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특별한 이벤트가 열리는 날마다 엄마는 귀신같이 내 앞에 나타났으니까. 남들처럼 김밥과 여러 음식을 바리바리 들고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우영우 같은 질문을 할 필요가 없었다. 상실감도 느끼지 않았다. 


다만 그 좋은 순간에 아버지는 늘 없었다. 학교 행사는 날 키우지 않는 엄마가 챙겼다. 둘이 헤어지면서 그렇게 약속이라도 했는지, 분업은 잘 지켜졌다. 


누나, 형 없이 처음으로 홀로 맞이한 초등학교 5학년 가을운동회. 그날 엄마는 이전보다 더 신경 쓴 옷차림과 진한 화장기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났다. 운동회의 하이라이트인 점심시간, 엄마는 학교 후문 밖으로 나를 데려갔다. 


우리는 학교 뒤편 작은 야산으로 조금 올라갔다. 10분 쯤 걸었을까. 시야가 트이고 볕이 좋은 곳에 자리한 산소 두 개가 나타났다. 잘 다듬어진 봉분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 앉은 남자가 보였다. 그날의 ‘스페셜 게스트’, 엄마의 연인이었다. 


그는 엄마가 이혼까지 하면서 선택한 남자, 나와 아버지의 집에서 가까이 사는 이웃집 총각이다. 나는 꾸벅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둘의 관계를 알기에 반감 같은 감정은 없었다. 

엄마는 돗자리를 펴고 김밥과 과일과 음료수 등을 그 위에 올렸다. 나와 엄마와 이웃집 총각은 무덤가 돗자리 위에 둘러 앉았다. 나는 말없이 김밥을 먹었다. 엄마도 엄마의 연인도 별 말이 없었다. 


학교 뒷산 무덤가는 고요했다. 밥공기를 엎어 놓은 듯한 봉긋한 두 봉분  위로 가을볕이 노랗게 쏟아졌다. 무덤가에 퍼지는 소리는 각자의 입에서 잘게 부서지는 김밥 속 단무지 파열음뿐이었다.


특별한 날의 무덤가 점심과 운동회를 모두 마치고 집에 돌아갔을 때, 아버지는 혼자 있었다. 아버지는 엄마가 왔는지, 김밥은 맛있게 먹었는지 등을 묻지 않았다. 엄마도 내게 “집에 가서 아버지한테 말하지 말라”는 식의 비밀유지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 어린 것이 어디서 어떻게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나 역시 그날의 운동회에 대해서 아버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고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은 비밀, 그럼에도 왠지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될 것만 같은 무덤가의 은밀한 점심식사. 


상담실 창으로 들어오는 봄볕이 너무 좋아 나는 주저리 주저리 그날의 기억을 상담선생님에게 들려줬다. 


“그날 가을볕이 정말 좋았거든요. 조용하고 평화로웠구요. 오늘처럼 볕이 좋거나,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보면 그날의 점심식사가 떠올라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여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상담사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상담사는 늘 선을 지키며 말을 아꼈는데, 그날도 짧은 소감만 말했다. 


“아름다운 날로 기억하고 계시네요. 그런 기억이 박상규 씨를 지켜준 게 아닌가 싶네요.”


1년여 이어진 상담 기간 중 선생님 눈에 물기가 맺힌 적이 두 번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이날이었다. 


오전 상담을 마치고 회사로 출근하는 버스 안. 나는 창가 쪽에 앉았다. 여전히 하늘과 볕이 좋았다. 버스가 출발하고 설 때마다 몸이 흔들렸다. 


돌아보니, 아버지는 모든 걸 알고 있었지 싶다. 그 특별한 날에 내가 누구와 김밥을 먹었고, 어린 내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지, 아버지는 다 알았을 거다. 그래서 굳이 물을 필요가 없었던 거고.  결국 비밀은 내가 아니라, 아버지가 지킨 거였다. 


아버지가 지켜준 비밀 덕에, 다 알면서도 끝내 추궁하지 않은 그 무심한 배려 때문에, 그 햇빛 찬란한 무덤가의 점심식사를 나는 아름답게 기억하는 게 아닐까 싶다. 특별한 이벤트 날에 아버지와 김밥을 먹은 적 없다는 게 내심 미안했는데, 그 모든 게 아버지의 배려였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창가로 쏟아지는 봄볕 때문인지 졸음이 밀려왔다. 나는 버스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추석 음식이 많이 남아 오랜만에 김밥 만들기에 도전했다. 밥은 그냥 밥통에 있는 현미밥을 좀 식혀 김 위에 얹었다. 잡채, 고사리, 아보카도, 매실장아찌, 계란을 넣고 둘둘 말아봤다. 현미는 찰기가 부족해 잘 말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너무 두꺼워 여기저기 터졌다. 


이런 것도 유전인지 모르겠지만, 나 역시 아버지처럼 김밥을 잘 만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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