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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규 Jan 07. 2023

염전노예가 건넨 바나나맛우유

처음엔 연락도 피하고 인터뷰도 거절하시더니, 이근만 아저씨는 만나자마자 내게 바나나맛우유를 건넸다. 나는 이런 거에 쉽게 흔들린다. 


오래전, 재심을 취재할 때도 그랬다. 살인 누명을 쓴 발달장애인 강인구 씨는 내게 캔커피를 줬다. 그 커피는 그의 냉장고에 있던 유일한 사물이자,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딱 하나의 음식이었다. 


[강인구 씨 관련 글 읽기 - 가짜 살인범 강인구, 그를 보고 운 진범]


염전노예 피해자 근만 아저씨 만나러 광주에 가면 할일이 많다. 아저씨 휴대전화에 번호를 저장해 주고, 독촉장과 고지서를 설명하고, 함께 주민센터에도 가야 한다. 


발달장애와 비장애의 경계에 있는 근만 아저씨에게 세상은 난해한 일로 가득 차 있다. 


함께 주민센터에 다녀온 지난 11월, 근만 아저씨와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먹었다. 아저씨는 눈을 감고 어묵을 씹으며, 포장마차 사장에게 말했다. 


“사장님, 정말 요리 잘 하시네요. 진짜 맛있게 잘 하시네요. 이렇게 맛있게 요리하는 게 쉽지 않거든요.” 


언제나 이런 식이다. 비록 어묵을 누가 만드는지 잘 몰라도, 아저씨는 상대방에게 늘 좋은 말과 칭찬을 한다. 아저씨에게 마음이 가는 건, 내가 아저씨를 닮았거나 공짜로 얻어 먹은 바나나맛우유 때문만은 아니다. 



아저씨를 만난 뒤 늦은 밤 서울행 ktx를 탈 때면 백석의 시가 자주 떠오른다. 오버스런 감정일 수 있지만,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나는 백석의 시 한 구절을 곱씹곤 한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잼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 이근만 아저씨 관련 글 읽기 - 프로젝트 '서칭 포 솔트맨 : 사라진 염전 노예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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