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막혔는데, 다음 이야기를 달라는 사람은 한가득이었다. 시간을 더 준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한 줄도 못 쓴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심장이 쪼그라 드는 느낌, 이젠 숨쉬기도 버거웠다.
내가 사는 집은 아파트 20층. 거실 창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극단적 선택하기에 딱 좋은 높이. 찬 겨울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추웠다. 한걸음 물러나 창을 닫았다. 무릎 튀어 나온 트레이닝 바지와 목 늘어난 셔츠 차림에 패딩만 걸쳤다. 예의상 양치질은 했다.
창문 대신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얼마 후 나는 정신과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차례가 되어 원장님 앞에 앉은 나는, 방금 아파트 20층 창가에서 주저했던 일과 지난 1개월간 겪은 가슴의 느낌을 길게 이야기 했다. 양치질 하고 오길 정말 잘했다.
“입원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내 사지가 침대에 묶이는 건가? 정신병원에 관한 편견에 영화, 드라마에서 본 장면이 겹치면서 덜컥 겁이 났다. 나는 '빽스텝'을 밟았다.
“저 드라마 4회 분량을 더 써야 하는데요. 제작사, 방송사, 배우, 스태프… 다 그걸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미쳤지. 16부작이었다면 진작에 끝났을 텐데, 왜 20부작을 쓴다고 해서 이 고생인지. 원장님이 말했다.
“입원 상태에서 쓰면 되죠. 제가 도와드릴게요.”
팔다리를 안 묶는 건 다행. 근데 드라마 대본 쓰다 정신과에 왔는데, 이젠 입원을 해서라도 써야 한다니. 역시 도망칠 곳은 없었다. 불안과 공포의 원인이 해결되지 않으면 마음의 고통도 끝나지 않는 법. 원장님은 명의였다.
막힌 대본이 심장을 조인 건 분명하나, 본질은 더 깊은 곳에 있을 터였다. 출렁이고 울렁이면서 종종 괜히 슬퍼지는 감정. 그 밑바닥을 보고 싶었다. 내 생애 첫 정신과 진료는 이렇게 시작됐다.
입원은 하지 않았다. 원장님의 진단과 조언에 따라 약물 치료-검사-심리상당이 이어졌다. 머리에 여러 케이블을 부착하는 뇌파 검사부터 수능을 보는 듯한 문제 풀이, 그림 그리기 등 여러 테스트를 했다.
심리상담은 전문 상담사에게 매주 1시간씩 총 8회를 받기로 했다. 비용은 1회에 10만 원. 비용보다 낯선 상담사와 2~3평 남짓한 방에서 뭔 이야기를 하나, 이게 고민이었다.
근데 웬걸, 나는 참 많은 이야기를 끄집어 냈다. 별 소리를 다 한다 싶은 것부터, 세상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앞으로는 누구에게도 하지 않을 법한 이야기까지. 어느 순간엔 ‘상담사 선생님이 비밀유지를 지키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까지 들었다.
2개월이 끝날 즈음, 각종 검사와 상담을 토대로 작성된 서류 몇 장을 정신과 원장님에게 받았다. A4 용지 약 다섯 페이지로 만들어진 나에 대한 일종의 ‘종합 보고서’.
이야기를 할 때면 커피나 물을 꼭 챙기는 나의 무의식적 습관부터 말투, 웃음을 터트리는 포인트, 슬픔과 비극을 말할 때면 오히려 웃는 버릇까지, 나를 자세히 분석하고 해석한 보고서. 여기에 내가 그린 그림과 문제를 푸는 패턴,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던 상황 등을 세밀히 적시한 내용까지.
당혹스러웠다. 보고서가 ‘나를 정확히 파악했다, 틀렸다’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 마음속의 ‘1급 기밀문서방’에 누군가 침입한 기분, 내가 몰랐거나 혹은 뻔히 알면서도 외면해온 나의 일면을 대면한 느낌. 나를 완전히 복제한 분신을 광화문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이런 기분일까? 보고서의 한 줄이 특히 거슬렸다.
“어린시절 부모에게, 특히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한 상처와 섭섭함이 있는 듯.”
하나도 새롭지 않은 내용이다. 그럼에도 내가 밥 먹다 돌을 씹어 이라도 부서지 듯이 눈을 질끈 감아 버린 건, 저 문장이 그동안 내가 애써 은폐했거나 모른 척 했던 핵심을 정확히 찔렀기 때문이다.
자기기만이 오래 지속된 나머지 이젠 사실을 마주할 용기마저 사라졌는지 나는 보고서를 한 번 읽고 찢어버렸다. 이 나이 먹고도 유년의 사랑과 상처에 발목 잡히는 것도 싫고, 다 지난 일이라 여긴 일에 크게 휘청이는 내 자신은 더 싫었다.
그렇다고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민 사실을 다시 억누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괜찮은 척, 강한 척, 쿨한 척 하다가 또 어느 날 또 베란다 창밖 아래를 보며 ‘OO 하기 딱 좋은 높이네’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나는 심리상담을 더 이어가기로 했다. 1개월도 아닌 무려 1년 말이다! (심리상담 전문가들은 1년은 긴 게 아니라고 한다.)
상담 초반에 나는 선생님에게 “종합보고서가 어느 정도나 맞느냐”고 따지듯 물었다. 중년의 가슴에 유년의 엄마에 대한 섭섭함이 남아 있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쿨하지 못한 것 같아 문제 지적을 못 받아들이는 신입사원처럼 괜한 고집을 피운 것이다.
그건 ‘내가 얼마나 강하고 인내심이 높은 줄 아느냐’는 허세였고, “당신 잘 이겨내셨다”는 격려를 받고 싶은 인정 투쟁이기도 했다. 나는 상담 선생님에게 엄마가 나를 사랑했다는 증거를 들기도 했다. 그건 엄마가 만들어준 음식에 대한 기억이었다.
엄마가 옆집 총각과 사랑을 택해 집을 떠난 이후, 엄마를 만나려면 나는 먼길을 나서야만 했다. 아버지 집은 의왕시 청계산 계곡에, 엄마 집은 안양시 남부시장 안쪽 창신여인숙 2층 끝에 있었다.
엄마가 보고 싶으면 초등학교 인근 버스정류장에서 12-1번을 타고 약 1시간 쯤 달려 안양으로 갔다. 엄마의 집은 여인숙 방 하나가 전부여서 작고, 볼품 없고, 누추했다. 살림살이도 별로 없었는데, 엄마는 언제나 그 이유를 쿨하게 설명했다.
“엄마는 왜 옷이 별로 없냐고? 종일 목욕탕에서 벗고 일하는데 뭔 옷이 필요하냐?”
“집에 왜 책이 없냐고? 잘 시간도 부족한데 어떻게 책을 읽어?”
“집에 음식이 없는 이유? 엄마 새벽 5시부터 밤 9시까지 일하잖아. 바쁠 땐 밥도 못 먹어!”
그럼에도 엄마의 그 작은 여인숙 방에는 밥솥 등 식기도구가 어느 정도 있었다. 엄마와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학교에 가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다시 12-1번을 타고 돌아가야 했는데, 1시간 버스 등교는 그때나 지금이나 아이들에겐 고난의 행군이다.
등교 하려 이른 아침에 눈을 뜨면 엄마는 이미 출근하고 없었다. 엄마는 아침 7시 즈음에 ‘신라장’ 목욕탕에서 창신여인숙 방으로 후다닥 달려왔다. 엄마 몸에선 목욕탕 비누 냄새가 났다. 내가 옷을 입고 가방을 챙기 때, 엄마는 밥을 짓는 등 아침을 준비했다.
오늘날 쪽방과 같은 그 작은 여인숙 방에서 뭐 대단한 음식을 할 수 있겠냐마는, 엄마는 계란 프라이 만큼은 빠트리지 않았다.
엄마가 곤로 심지에 붙을 붙이면, 검은 그을음 연기와 함께 기름 타는 냄새가 났다. 곤로 앞에 쪼그려 앉은 엄마가 검은색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계란을 올리면 ‘지지직~’ 소리가 작은 방에 퍼졌다. 계란을 부치는 엄마의 퍼머 머리카락에선 언제나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머리 말릴 틈도 없이 목욕탕에서 달려온 것이다.
엄마는 연애 욕구만큼이나 생활력이 강해 몇 년 뒤 창신여인숙을 떠났다. 집이 넓어지고 부엌이 생기고, 냉장고도 커졌으니, 엄마가 만든 음식도 늘어났다. 성인이 될 때까지 아버지 집-엄마 집을 오가며 살았으니, 그 세월 동안 엄마가 내게 해 준 음식은 많다. 그럼에도 “엄마가 해준 음식”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계란 프라이다.
종합 보고서의 한 줄이 아니어도, 자식과 가정을 버리고 사랑을 택한 엄마에 대한 섭섭함은 저 깊은 곳에서 가끔씩 고개를 들곤 했다. 때로는 분노의 얼굴로, 가끔은 짠한 표정으로 말이다.
분노가 짠함을 누르고 나를 흔들면, 원망이 답답하게 가슴을 누르면, 나는 엄마 머리에서 올라오던 하얀 김과 기름 타는 냄새와 창신여인숙 2층 끝방에 퍼지던 ‘지지직~’ 계란프라이 만들어지는 소리를 떠올리곤 한다.
‘그래도 엄마는 계란 하나 때문에 그 아침에 달려왔었지.’
그 시각, 후각, 청각… 이 명백한 감각이 사랑의 증거가 아니라면 도대체 뭐가 사랑일까. 이런 나의 생각은 자기만족적 최면일까, 아니면 스스로를 속이는 기만일까….
내가 여기까지 이야기 하자, 좀처럼 말이 없던 상담 선생님이 짧은 의견을 밝혔다.
“박상규 씨가 엄마를 종종 얄밉게 여기다가도, 그 감정이 미움과 증오로 나아가지 않은 건 그런 기억 때문인 거 같네요.”
인정 투쟁에서 승리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저 이야기를 하면서 그 시절의 창신여인숙 2층 끝방에 한 번 다녀온 기분이었다.
일주에 하루 딱 1시간씩. 상담사 선생님은 위로나 조언, 해답을 주지 않았다. 선생님은 족집게 도사나 만능 해결사를 자처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말하는 걸 들어주고, 내 말이 끊기면 기다리고, 정말이지 더는 할 이야기가 없을 때는 “오늘 햇살이 어떤 것 같냐”고 가볍게 물었다. 나는 아무 강요가 없는 분위기에서 엄마, 아버지, 작은누나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이 흘렀다.
지금까지 내가 내 돈 주고 한 최고의 소비는 심리 상담과 정신과 진료지 싶다. 힘들게 마감을 했더니 벌서 배가 고프다. 마트에 들러 계란을 좀 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