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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가난과 고통은 나에게 현금이었다

by 박상규

그 겨울밤은 아름다웠다. 관객 500명이 앉을 수 있는 영등포아트홀은 진작에 꽉 찼고, 무대의 주인공은 나와 박준영 변호사였다. 초대 가수가 노래하고, 유명 영화 감독과 훗날 MBC 사장이 된 분의 축사가 이어진 밤. 많은 사람이 우리의 말에 웃고, 환호하는 시간. 행사의 이름은 ‘파산 토크 콘서트’였다.


나는 박 변호사와 2015년 초부터 일명 ‘재심 3부작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억울하게 살인누명을 쓴 사건(무기수 김신혜 사건, 익산 택시기사 살인사건,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치사사건)을 보도하고 법정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프로젝트.


피해자들이 살인누명을 벗거나 재심이 확정되기까지 약 2년이 걸렸다. 월급 등 외부 지원 없이 활동한 우리는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어려움 속에서 끝내 문제를 해결한 우리에게 많은 사람이 “정의롭다”며 박수를 보냈다. 현장에선 우리의 책이 수백 권씩 팔려 나갔고, 사인 받으려는 사람의 줄이 길게 이어졌다.


많은 술과 음식이 차려진 뒤풀이 자리에서도 덕담과 박수가 계속됐다. 나는 이 자리, 저 자리 불려가며 술을 받고 따라주고 함께 건배했다. 내 생애에 또 이런 날이 있을까 싶은 2016년 12월 17일 토요일 밤이었다.


달콤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던 겨울밤의 추억은 문자 메시지 한 통으로 금이 갔다. 발신인은 가짜 살인범 임명선이었다.


“기자님, 저 너무 추워요. 집이 난방이 안 돼 발에 동상 걸릴 거 같아요. 엄마랑 저, 따뜻한 물이 나오는 곳에서 살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그의 메시지는 내가 뒤풀이의 술과 환대에 푹 빠져 있던 12월 17일 밤에 도착했다. 나는 스마트폰 바탕화면으로 ‘발신인 임명선’만 봤을 뿐, 도착 직후엔 메시지함을 열지 않았다. 술자리의 흥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날 밤 내가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다음날 아침, 해장을 위해 전복죽을 만들면서 전날 그가 보낸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다 나는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그가 살인 누명을 쓴 과정과 인생 이야기를 보도한 나는 수백 명에게 박수와 환호를 받는 것도 모자라 밤새도록 술까지 얻어 먹었는데, 정작 내 보도의 주인공은 난방도 안 되는 집에서 밤새도록 추위에 떨고 있었다니.


이 기막힌 모순과 위선의 상황을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할 말도 내세울 만한 핑계도 없어 바로 임명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현병 앓는 엄마와 오래된 시골집에 살던 임명선은 “따뜻한 난방이 되는 원룸으로 이사하고 싶다”고 했다.


전북 전주에 살던 그에게 필요한 건 원룸 보증금 300만 원. 겉만 화려한 무대의 주인공이었지 백수 기자로 2년간 취재하고 보도한 내게도 그 돈은 없었다. 나는 이자 20%에 이르는 카드론을 받아서 그에게 송금했다. 약 30분 정도가 지났을까. 그에게 다시 문자가 왔다.


“기자님, 50만 원만 더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또 무슨 상황일까. 그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부동산 중개료를 내야 해서요….”


힘 없는 그의 목소리에는 미안함 말고는 아무 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나는 카드론을 추가로 받아 그에게 송금했다. 그렇게 무리를 해서라도, 돈으로라도, 위선의 주인공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사실 상황이 극적이었을 뿐, 이때의 일이 특별한 건 아니다.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치사사건’의 주인공인 임명선을 2015년 봄 처음 만났다. 이때부터 임명선은 나에게 돈을 빌렸다. 인터뷰를 앞둔 어느 날엔 “현금 1만원만 빌려달라”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나는 그가 메시지를 입력하며 실수로 ‘0’ 하나를 빠트렸다고 생각했다. 10만 원을 ATM에서 찾아 건네자 그의 눈이 커졌다.


“왜 이렇게 줘요? 난 1만원만 요청한 건데….”


그의 메시지는 실수가 아니었다. 그에겐 1만원이 없었고,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 생활이 곤궁해 돈이 필요한 건 임명선만이 아니었다. 함께 살인 누명을 쓴 두 친구 최대열, 강인구도 비슷한 처지였다.


[가짜 살인범 임명선의 스토리 읽어보기]


수시로 도착하는 이들의 SOS에 적절히 응답하는 것도 나와 박 변호사에겐 버거운 일이었다. ‘재심 3부작’을 취재하고 보도한 2년을 그렇게 살았다.


이들에게 자립을 요구하는 건, 앞뒤가 안 맞는 말이었다. 부모와 집이 있고 4년제 대학까지 나와도 자립을 못하는 일명 ‘켕거루족’이 넘치는 사회 아닌가. 그런데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본인 아니면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으며, 살인 누명까지 쓴 사람에게 자립을 강요하는 건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어쨌든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재심 3부작’은 2016년 말에 좋은 결론이 나왔다. 살인 누명의 주인공들은 김신혜를 제외하고 모두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나도 탐사보도 매체 진실탐사그룹 <셜록>을 만들어 새출발을 했다.


나의 사업은 시작과 동시에 폭망했다. 급여일 25일이 다가오면, 직원들 월급 밀리지 않기 위해 여기저기 돈 빌리러 다녀야 했다. 급여는 한 번도 밀리지 않고 지급했으나, 겨우 버티며 나아가는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다. 임명선에게 다시 문자메시지가 온 건 하필이면 그토록 힘든 시절이었다.


“기자님, 저 50만원 빌려 주실 수 있을까요? 자동차보험을 갱신해야 하는데, 돈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살인 누명을 벗었지만 아직 국가로부터 보상금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어려움에 처한 사업이 아니었다면 나의 마음이 너그러웠을까. 나는 임명선에게 전화를 걸어 괜한 말을 하고 말았다.


“명선 씨, 돈이 없으면 차를 팔든가 해야죠. 보험료도 못 내면서 왜 차를 갖고 계십니까. 저도 많이 힘든데, 자꾸 이러시면 제가 정말 괴롭습니다.”


2017년 봄날, 임명선의 나이는 이미 서른을 넘겼다. 그라고 왜 자존심이 없겠는가. 고작 50만 원 때문에 한소리 들은 그는 얼마나 모멸감을 느꼈을까.


전화를 끊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다시 카드 현금서비스를 받아 그에게 50만 원을 송금했다. 그는 “꼭 갚겠다”고 했지만, 원룸 보증금을 비롯해 지난 2년간 그랬듯이, 그럴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게 뻔했다. 돌려받지 못할 걸 너무 잘 알았기에 그동안 그를 비롯해 삼례 3인조에게 준 돈을 따로 기록해 두지도 않았다.


세월은 잘도 흘렀다. 또 다시 임명선에게 문자메시지가 도착한 건 2017년 어느 날이었다. 덕수궁 인근 스타벅스에서 일하고 있던 나는 짜증 섞인 한숨을 쉬고 메시지함을 열었다. 누런 종이에 숫자가 적힌 사진 한 장이 도착해 있었다.


<빌린돈>

2016년 12월 9일 30만원.

2016년 12월 20일 350만원. (정확한 날짜는 12일 18일인데, 착오가 있는 듯)

2017년 1월 14일 35만원

2017년 3월 5일 50만원

2017년 5월 4일 25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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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말 이후 내게 빌린 돈을 빼곡히 기록한 임명선의 노트. 이후 그에게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기자님 저 형사보상금 받았습니다. 그동안 너무 감사했습니다. 빌려주신 돈 이제야 갚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려서 일을 할 수 없었다. 나는 임명선에게 전화를 걸어 따지듯 말했다.


“명선 씨, 당신이 여기서 돈을 갚으면 안 되지! 강의나 인터뷰 때 내가 얼마나 잘난 척, 정의로운 척을 하면서 ‘나는 불쌍한 취재원 생활비 주면서 취재했다’고 말하고 다니는 줄 알어? 근데 여기서 당신이 돈을 갚으면 어떻게 해…. 당신이 이러면 내가 더는 착한 척, 정의로운 척을 할 수 없잖아.”


나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임명선의 메시지를 받고 가슴과 손이 떨리고 눈물이 난 건, 그의 가난과 고난을 이용해 나의 선함을 고양하려 했던, 그러면서 뒤로는 지갑을 두둑히 채워온 나의 위선이 다시 한 번 들통났기 때문이다.


전화를 끊고도 한동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나는 스타벅스에서 오래도록 고개를 들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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