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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Ji Youn Apr 27. 2020

스스로가 드래곤임을 잊지 않기를

초콜릿 하트 드래곤의 어벤추린처럼

아이가 무언가에 집중을 할 때마다 짬을 내서 책을 읽는다. 그런데 이 집콕의 기간 동안 엄마와 24시간을 함께 있다 보니, 엄마에 대한 애착이 더 강해져서 일까. 아이는 엄마가 다른 일에 신경 쓰는 것에 자꾸 샘을 내곤 했다.


잠들기 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아이는 진심으로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엄마에게 물었다.


“그림이 하나도 없는 책이 뭐가 재미있어?”

“상상을 할 수 있거든.”


그리고 급하게 상황 하나를 만들어 묘사하기 시작했다.


“큰 창문 밖에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있어. 나무는 초록빛 나뭇잎을 잔뜩 품고 있었는데, 햇빛에 비치다 보니 반은 초록색 반은 노란색으로 보이는 것 같았지. 바람이 불 때면, 흔들리는 나뭇잎이 유리창문을 때리는 바람에 창문을 열어보았어. 따뜻한 바람이 들어왔지.”

“오 재미있어!!”


그래서 아이에게 겁도 없이 청소년 소설 하나를 읽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얇은 동화책 한 권 읽어주는 것도 버거워하는 엄마인데 말이다.


선택한 책은 “초콜릿 하트 드래곤 (스테파니 버지스 지음)”이었다.




책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림 그리기를 워낙 좋아하는 아이는 표지를 오랫동안 쳐다보더니, 빨리 읽어달라며 당당하게 주문했다. 별 생각 없이 그 자리에서 한 장 한 장 소리 내어 읽어가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들으며 아이는 드래곤의 모습도 그려보고, 뜻을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물어보고, 주인공 어벤추린이 드래곤에서 사람을 변한 뒤 처음으로 옷을 사는 장면이 나올 때는 다시 책을 빼앗아 가 표지를 유심히 들여다 보기도 했다.


100 페이지가 넘어가서야 잠시 쉬게 되었는데, 쉬는 동안 집중력이 흩어진 아이는 다른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이를 위해 산 책이었지만, 아이가 다시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되기까지 책을 덮어두고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 다음 이야기가 너무나도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이야기는 이렇다. 주인공 어벤추린은 어른들의 잔소리가 답답하기만 한 어린 드래곤이다. 호기심이 많고 탐험을 떠나고 싶지만, 비늘도 단단하지 않은 어벤추린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다. 어벤추린은 혼자서도 잘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내고 싶은 마음에 탈출에 성공하고, 가장 위험한 동물인 '인간'은 조심해야 한다고 할아버지가 누누이 충고를 주었건만, 인간을 잡겠다는 시도를 했다가 그만 인간의 속임수에 당하고 만다. 마법의 핫초콜릿을 마시고 인간의 몸으로 변하게 된 것. 그런데 그때 처음 마셔 보았던 초콜릿의 매력에 빠져, 초콜릿을 향한 사명을 품고 초콜릿 도제가 되기 위한 여정을 떠나는 과정의 스토리다.



내가 지금 울고 있는 건가?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나는 이를 악물고 눈물을 삼켰다. 불을 삼키는 것보다 더 아팠다. 하지만 나는 드래곤이다. 드래곤은 막강한 존재다.

나는 눈을 힘차게 깜빡이고 애써 몸을 움직여 사람들 틈으로 나아갔다. 그들의 말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고, 그들이 풍기는 냄새가 공기 중에 진동하고, 그들의 몸이 숨 막히게 가까이 다가와도 그러려니 하고 내버려 두었다. 그래 봤자 나는 이 도시에서 가장 강력한 맹수이니까. 하지만 지평선의 산봉우리들 쪽에는 다시 눈길을 주지 않았다. -156 p


나에 대한 그레타의 평가는 틀려도 단단히 틀렸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현혹되어 고개를 수그렸던 나 역시 틀렸던 것이다. 부드럽고도 잔인하게 나를 비웃던 말들과, 마리나의 주방에 있는 그 어떤 재료보다도 쓰디쓴 독 같은 연민에 휘둘려서, 내가 정말로 그레타의 생각처럼 무력한 존재라고 믿어 버렸다니.

그건 결국 나 자신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인간의 몸으로 변신한 이래 나는 스스로가 무력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은밀한 두려움을 품어 왔다. 보잘것없는 인간의 몸뚱이에 갇힌 나를 볼 때마다 절망스러웠고, 가족들의 예견대로 나는 역시 잘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실패작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중략)

나는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도 나은 존재가 되었다. 나는 바로 ‘나’다.-253p


실케에게 드래곤다운 구석이 있음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저 커다란 체구의 남자와 눈싸움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녀의 몸을 둘러싼 비늘이 번뜩이는 것까지 보이는 듯했다.

“세상에는 우정이라는 것도 있어.”

광장 시장에서 실케에게 들었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이제야 비로소 이해가 됐다. 나는 앞으로 평생 그녀의 곁에서 싸울 것이다. – 278p



어벤추린은 겨우 12살의 어린 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벤추린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고 응원하고 싶고 때로는 공감이 갔는 이유는, 어른이 된 나의 과거의 이야기 혹은 지금의 이야기와 같기 때문은 아닌가 싶었다. 이 작은 아이가 목표를 설정하고 이루어가는데 얼마나 큰 역경을 겪으며 성장해 나가려나 싶었지만, 사실 어벤추린이 듣고 경험하는 사회와 스스로의 자존감을 지켜가는 태도 그리고 성장 과정은 나이와 상관없음을 느끼게 되었기에.


아이가 언제 이 책을 끝까지 읽게 될지는 기약할 수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 책을 읽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목표를 차근차근 이뤄나가는 어벤추린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꽂이에 꽂아 놓는다. 


스스로가 드래곤임을 잊지 않기를 바라며. 




사진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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