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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Ji Youn May 09. 2023

아플 시간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아픈 것에 관하여 병실 노트_버지니아 울프,줄리아 스티븐]을 읽었습니다

주변에 아픈 사람들이 유독 많았던 시기가 지나가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초반에는 서로가 문을 꽁꽁 걸어 잠그기 바빴지만, 워낙 흔해지면서(?) 모두가 한 번씩은 앓게 되고 그러면서 주변을 위로하고 돕는 문화가 조금씩 퍼져나간 것 같아 훈훈하기도 하다. 모든 현상에는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있음을 확인시켜준 사례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이 시기에 카카오 선물하기는 매우 유용했다. 직접 대면하지는 못하지만 코로나로 고생하는 지인들에게 비타민이나 과일, 입맛을 되살릴 달콤한 디저트 등을 선물하기도, 선물 받기도 했다. 집에만 있게 될 아이를 걱정하며 놀 거리를 보내준 지인 덕분에 마음이 따뜻해졌던 기억도 있다.


하나의 트렌드 같았던 팬데믹 절정의 시기에는 아프면 당당하게 쉬고, 배려 받고 배려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다. 그런데 팬데믹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잠잠해지자 ‘아프다’는 것이 얼마나 번거롭고 불편한 것인가를 다시 느끼게 됐다.


몸살이 났다. 요즘 유행하는 감기에 걸린 아이에게 옮은 것이 분명했다. 


‘아프다’는 것에 ‘번거롭고 불편하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야 말로 번거롭고 불편하다. 누가 자발적으로 아프고 싶을까. 하는 수 없이 겪게 되는 상황이라 내가 참으로 불쌍하지만, 아프게 되면 어느 정도 짜증스러운 느낌마저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아프고 고통스러우니 내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야 할텐데, 왜 나는 평소에 건강을 미리미리 챙기지 못했는지, 왜 하필 지금 같은 시기에 아파야 하는 것인지, 나를 향한 원망이 쏟아진다.


아픈 육체를 보듬기보다는 원망만 가득한 나와는 달리, 아픈 순간을 담담하고 우아하게 담아내는 버지니아 울프는 정말이지 다른 존재다.


[아픈 것에 관하여 병실노트]는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 '아픈 것에 관하여'와 버지니아 울프의 어머니인 줄리아 스티븐의 간병인 지침서'병실노트'를 합본한 책이다. [아픈 것에 관하여]는 버지니아 울프가 1925년 신경쇠약을 경험한 후, 침대에서 썼다. 몸이 아픈 상태에서 생각의 흐름이 어떻게 이렇게 단단하게 이어질 수 있는지 존경스러울 정도다. 왜 이렇게 아파야 하는지, 얼마나 괴로운지에 대한 자신을 향한 동정심은 없다. 


매일 육체가 겪는 드라마에 대한 기록은 없다.
사람들은 늘 정신의 활동, 거기에 다가드는 생각들, 정신의 숭고한 계획들,
정신이 어떻게 우주를 교화하는지에만 신경 쓴다. _19p


읽어보니, 그렇다. 사실, 우리의 고귀한 생각들과 계획들 그리고 논쟁들은 모두 육체가 건강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매일 우리의 육체가 어떤 흐름과 과정으로 우리의 뇌를 지탱해주고 있는지에 대한 문학적인 논의는 비교적 빈약한 것만 같다. ‘건강한 신체에서 건강한 정신이 나온다’는 진리는 말 뿐, 우리는 호되게 정신 상태를 채찍질 하고 그에 맞춰 몸도 혹사시키며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어린 여학생이 사랑에 빠지면 마음을 대변해줄 셰익스피어나 키츠가 있다.
하지만 환자가 의사에게 머릿속 통증을 묘사하려고 하면 곧 언어가 말라버린다. 그를 위해 준비된 표현이 없다. 직접 어휘를 만들어야 하는데, 한 손에는 통증을, 다른 손에는 순수한 소리 덩어리를 들고 (아마도 태초에 바벨 사람들이 그랬듯이) 돌을 짓누르면 결국 새 어휘가 툭 떨어진다. _20p


내가 겪는 통증에 대해 어휘를 만든다면, 의사가 참을성을 갖고 들어줄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내가 얼마나 어떻게 아픈지 그만큼 들여다볼 노력을 나에게 준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그런데 나는 그런 노력을 나에게 주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내 아픈 몸을 다독여주기 보다는 약의 효능에만 몸을 맡긴 채, 머릿속은 이 시간이 그냥 흘러간다는 안타까움으로만 채우고 있다.


나는 아프면 안 된다. 당장 내가 아프면 아이는 누가 지금처럼 챙길 수 있단 말인가. ‘아니오’를 말하기에는 두려운 프리랜서의 입장에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업무 능력 만큼이나 중요하다. 게다가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여기는 성격인지라, ‘푹 자고 푹 쉬어’라는 말을 좀처럼 편안하게 행하기가 어렵다. 불편하다.


일 분 일 초가 아까운 현대인들에게, ‘아프다’는 ‘멈춤’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아파서 자신이 불쌍하기 보다는 불안한 지금의 사람들에게, ‘아프다’에 대해 이렇게 길게 에세이를 써내려간 버지니아 울프가 경이로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어쩌면 버지니아 울프의 어머니인 줄리아 스티븐 (이 책의 후반부인 [병실 노트]는 줄리아 스티븐이 써내려간 간병인을 위한 설명서다. 줄리아 스티븐이 간호에 얼마나 전문적이면서 섬세한 사람인지 확인할 수 있다.)의 모습을 지켜보며 컸기 때문에, ‘아프다’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늘 품고 살았던 덕분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책을 덮으며 한 번 크게 숨을 내쉰다. 이제 나에게 짜증과 화는 그만 내고 내 건강에 대해 ‘팩트 체크’가 아닌 ‘사색’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보고자 한다. 이 책의 표지와 내지의 촉감, 그리고 고서(古書)들이 가득한 서점의 향수를 느끼게 해주는 냄새는 덤이다.


그리고 아플 시간조차 없는 바쁜 우리들에게, 가끔은 불안해하지 말고 아픈 것 자체를 온전히 느끼면서 쉬어도 된다고 위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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