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았다. 하나의 생명이 내 품안에서 자고 웃고 울고 한다는 기쁨을 만끽한지 며칠이 지났을까. 어느 순간 세상이 온통 위험한 것들의 집합체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뉴스를 보면 유독 우울한 이야기만 귀에 쏙쏙 들어왔고, 집 안은 아이를 다치게 할 가능성을 지닌 가구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게다가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갓난아이와 단 둘이 하루 종일 집 안에 갇혀 지내자니, 이보다 더 한 불행도 없을 것 같았다.
아이가 3세정도 되었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세상을 어둡게 보니, 아이도 세상을 어둡게 보겠구나. 당연했다. 위험한 세상에서 아이를 키우려면, 하지 말아야 할 것 투성이었다. 나도 모르게 아이를 제재하는 일들이 많았고, 한창 말을 배워야 할 나이에 그런 내 말투를 듣고 있었다. 아이가 또래에 비해 다양한 경험을 하지 못하고 온실 속의 화초로 자라는 것 같았다.
세상을 보는 방법을 바꿔야만 했다. 내가 세상을 밝게 바라봐야, 아이도 밝은 세상에서 살 것이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년에 걸쳐 내 것이 되어버린,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어두운 시각을 바꾸기란 커다란 챌린지였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도전이었다.
다행히도 세상을 바라보던 기존의 프레임은 부단한 노력에 의해 방향을 바꿀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이제는 제법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데 익숙해졌다.
내가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방식에는 특별한 방법이 있다.
나는 나 ‘김지연’이라는 소설의 작가이다. 작가인 나는 내 소설의 주인공이 행복할 수 있도록 세계관을 설정한다. 물론 때때로 세계관은 수정이 된다. 주인공이 나이를 들어감에 따라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사건이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주인공이 나이 들어간다는 것에는 감사한 점도 있다. 경험이 쌓일수록 주인공의 가치관이 자연스럽게 달라지고,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명확해 진다. 작가인 나는 주인공인 나와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들을 주변 인물로 설정해두고, 싫어하는 것은 되도록 멀리 배치해두고, 좋아하는 것들은 많이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도록 상황을 계획한다.
그렇게 세상을 보는 나의 눈이 달라져가는 중이다.
입추, 말복, 처서, 추분 등 가을과 관련된 절기는 물론이고 추석까지 무더위로 고생했던 올 여름. 우리 가족은 태국의 치앙마이로 2주간의 힐링 여행을 떠났다. 무리한 계획 없이 유유자적 자연과 음식을 즐기던 중, 조식을 먹고 주변을 산책할 때마다 내 시선을 사로잡은 장면이 있었다. 내 또래 혹은 나보다 나이가 많은 커플들이 짧은 바지와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조깅하는 모습이었다.
조깅하는 사람들은 한국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똑같은 광경이라도, 온갖 의무에 지쳐 삶에 무뎌진 상태로 바라보는 것과 여유 있는 상태에서 바라보는 것은 확연이 다르다.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쨍쨍한 햇빛 아래에서 뛰어온 시간이 오래 축적되었는지 적당한 구릿빛이 감도는 피부색도 인상적이었지만, 팔과 다리의 잔 근육들에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이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미의 기준과는 거의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이었지만,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서 운동으로 가꿔온 결과가 훨씬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삶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하나 더 추가가 됐다. 세상을 바라보는 내 시각이 다시 한 번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한국으로 귀국 후, 더위가 조금이라도 누그러지기를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거실 한 켠에 고이 모셔두고 있던 새 런닝화와 무릎 보호대를 착용하고 밖으로 나섰다. 마침, 집 근처에서 5km 코스도 신청할 수 있는 마라톤 대회가 열려 신청까지 마친 상태였다.
목표가 있으면 실행이 더 수월한 법이다. 마라톤 대회가 2달 정도 남은 상태였기에, 연습 기간도 너무 늘어질 걱정 없이 딱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걷는 것을 워낙 좋아했기 때문에 5km 뛰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 여러모로 상황이 좋았다.
그런데 걷는 것과 뛰는 것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평균 심박 수와 운동 칼로리가 드라마틱하게 치솟는 만큼, 중간에 쉬고 싶은 순간도 여러 차례 찾아왔다. 운동을 마치고 거울을 보면, 팔 다리는 그대로인데 얼굴만 홍당무처럼 빨갛게 달아올라 깜짝깜짝 놀랐다. 힘들어서 헥헥거리는 나를 누가 볼까봐 부끄러워, 챙이 넓은 모자를 급하게 주문하기도 했다.
그렇게 준비했던 마라톤 대회가 이제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독이 되는 운동이 아닌 득이 되는 운동을 위해, 빠른 기록 보다는 바른 자세에 더 치중할 수 있었다. 덕분에 치앙마이에서 보던 롤 모델만큼은 아니어도 꿈꾸는 몸매를 만들기 위한 기본은 다져가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가능하다면, 잔 근육이 드러나는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뛸 수 있는 건강한 백발 할머니가 되고 싶다. 그래서 지금, 내가 만든 ‘건강한 아름다움이 중요한 세계‘에 머물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고맙다.
내가 만들어가는, 그래서 내가 살고 싶은 세계는 나만의 이상향이 된다. 더 많은 경험을 쌓아갈수록 나의 이상향은 점점 더 견고해진다. 나이듦의 경이로움이랄까.
하지만 그 세계는 언제나 ‘진행 중’일 수밖에 없다. ‘완공’이 없다. 그것이 목표인 적도 없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지혜롭겠지만, 오늘보다 내일이 더 현명한 삶을 앞으로도 끊임없이 반복해 나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아름다움’은 앞으로도 나의 세계관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겠지만, 건강한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한 방법은 언젠가 변경될 예정이기는 하다. 내가 아무리 달리는 백발 할머니를 꿈꾼다고 해도, 달릴 수 있는 기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이니까.
지금의 세계관이 언제까지 유효할지, 어떤 이유에서 또 바뀌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내가 주인공인 삶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고, 주인공이 행복한 소설을 쓰는 작가이고 싶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확실한 것은, 이렇게 세상을 보는 눈을 연습하고 발전시켜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이라는 것이다.
내가 밝게 바라봐야 아이도 밝은 세상에서 살 것이라는 생각은, 어쩌면 아이가 커 갈수록 내려놔야 하는 나의 욕심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엄마의 도움이 필요 없게 되는 나이가 되면, 아이도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될 테니 말이다.
시작은 아이를 위한 것이었는데, 이 노력이 더 이상 아이에게 필요가 없어지는 순간이 온다면 서운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괜찮다. 덕분에 나는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 순간이 올 때까지 아이가 나를 통해 세상을 설레는 마음으로 바라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