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하다. 공부는 왜 해야 하는지, 운동을 하면 왜 좋은 것인지, 왜 바른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 것인지, 게임을 많이 하면 왜 나쁘다고 하는 것인지 수없이 물어보는 ‘왜?’에 대한 이유는 한결같이 당연한 것뿐인데 말이다. 오히려 왜 모르는지 반문하고 싶을 지경이다.
공부는 하면 할수록 아는 것이 많아지고, 아는 것이 많아지니 얻을 수 있는 기회도 많아지더라. 운동을 하니 체력이 좋아져서 하고 싶은 것을 오래도록 붙잡고 할 수 있더라. 자세가 나쁘면 꼭 아파서 불편한 곳이 생기더라. 게임을 많이 하면 나도 모르게 버려지는 시간이 너무 많더라.
그런데, 아이가 ‘왜’를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들을 한데 모아놓고 보니 공통점이 있다. 오랜 시간 동안 겪어봐서 알게 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이제 겨우 세상에 태어난 지 10년 밖에 되지 않은 아이의 ‘왜?’가 당연해 보인다.
그런 아이를 이해해 보고자 노력한다.
아직은 모를 수밖에 없으니까 넓은 마음으로 꾹 참고 반복해서 말해준다.
간혹 반복해서 말해주는 이유가 잔소리의 소재가 되어버리고는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알고 있지만, 너는 모르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감출 수가 없어서다.
아이를 키우면서 이토록 속상한 일이 또 있을까 싶다. 인생은 경험을 해봐야만 알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길을 돌이켜보면, 뿌듯한 순간도 많았지만 후회로 가득한 순간 역시 가득하다. 다행히도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와 다르다.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상황을 바꿔 행동할 수 있는, 그런 용기와 지혜를 지금의 나는 지녔다. 다양한 경험에서 얻은 축척된 교훈들 덕분이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제는 다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리고 돌아가고 싶은 나의 그 시기에, 지금 내 아이가 서 있다. 아이는 이제 막 초등학교 고학년에 들어서면서 처음으로 친구와의 관계를 고민하고, 피구를 잘해서 인기가 많은 친구와 비교하며 체육에 소질이 없는 자신을 탓하고, 외모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아이에게 “괜찮아. 다 지나가는 일이야.”라고 수없이 말한다. 진짜니까. 엄마는 아니까.
하지만 “괜찮아. 다 지나가는 일이야.”라는 말은 아이에게는 잔소리가 되어 주변으로 흩뿌려진다. 그리고 어딘가에 부딪혀 메아리처럼 나에게로 돌아온다.
삶이 경험이 아니라 공부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우리는 아인슈타인을 만난 적은 없지만, 그가 발표한 상대성 이론은 이해하고 안다. 과거에 살아보지도 않았지만, 기원전 인류의 생활이나 지구의 표면이 어떻게 움직이고 육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안다. 기록으로 전달된 지식을 반복하며 습득한다. 심지어, 실제로 눈으로 볼 수 없는 추상적인 개념도 연습을 통해 머리로 이해한다. 공부여서 그렇다. 한 가지 교훈을 얻기 위해 몇 년간의 시행착오를 겪어야 할 필요도 없고, 상처받을 일도 없다. 세상에, 공부가 가장 쉬웠다는 말은 명언이었다.
그런데 신은 꼭 나만의 경험을 통해서만 삶을 알 수 있도록 설계하셨다. 성공한 사람들의 경험담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아무리 위인전을 많이 읽고, 남들이 써 놓은 자기 계발서를 밑줄 쳐 가면서 정리해도 내 삶에는 드라마틱한 변화가 없다. 저들이 알려주는 삶의 비법을 내 머릿속에 저장하였으니 인생의 고비를 한 번에 몇 단계씩 건너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 그들의 무용담에서 등장한 시행착오를 차근차근 답습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래서 40대에 들어선 이후로는 자기 계발서를 끊었다. 참 오랜 시간 동안 남들의 경험담에 의지하고자 안간힘을 썼구나 싶다.
삶이 반드시 내가 직접 경험해야만 성장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애착이다.
내가 눈길 한 번 더 주고 손길 한 번 더 건넨 물건에 애정을 느끼듯,
내가 지나오는 시간에 꼭 내 정성을 심고 지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요행을 바라는 길에 애착이 생길 수 없다. 거저 얻은 부는 눈앞에서 잃어도 아쉬움이 없다. 남의 것에는 정성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인생을 오래 경험하신 분들이 앞으로 빨리 가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어린 사람들에게, 시간이 오래 걸려도 돌아가도 괜찮다는 말을 당연하게 하시나 보다.
아이가 고민하는 상황은 나에게 너무 뻔하다. 대개 그다음에 펼쳐질 일도 눈에 훤하다. 다 지나갈 일이라고 말해줘도, 아직은 지나가지 않은 일이기에 그리고 고민의 한가운데에 있는 아이이기에 내 말은 당연히 들리지도 않는다.
내 머리로는 이 또한 아이가 자신의 삶에 애착을 갖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을 이해하지만, 내 마음이 여전히 안타깝고 속상하다. 내가 아는 것을 너에게 다 알려주고 싶어도 너는 모른다는 것이 부모의 입장에서 이렇게 애가 타는 일일 줄이야.
오늘도 아이에게 “괜찮아.”라는 말을 건넨다. 그 말은 오늘도 아이의 마음속에 들어가지 않고 잔소리가 되어 튕겨나간다. 여기저기 부딪히며 무뎌진 “괜찮아”라는 말은 내가 건넸던 목소리보다 덤덤해진 상태로 나에게 되돌아온다.
내가 아이에게 건넨 “괜찮아.”라는 말이 자꾸 나에게 돌아오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어쩌면 “괜찮아.”는 지금 나에게 필요한 말이어서인지도 모른다. 아이를 보며 안타까운 이 마음도 결국에는 지나가리라는 “괜찮아.”말이다.
언젠가 아이가 아는 것을 내가 모르는 순간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아이에게 느끼는 감정을 아이가 나에게 느낄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엄마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는 그저 내가 아이에게 했던 말을 해주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다.
“괜찮아. 다 지나갈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