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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사월 Sep 29. 2020

이 세계의 내가 그 세계의 당신에게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리뷰


이 세계의 내가 그 세계의 당신에게


episode 1 : 지금은틀리고그때는맞다

실수로 수원에 하루 일찍 내려온 함춘수가 옛 궁에서 윤희정이라는 여자를 만난다. 그는 희정과 하루를 함께 보내게 된다.


episode 2 :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실수로 수원에 하루 일찍 내려온 함춘수는 옛 궁에서 윤희정을 만난다. 그와 희정은 하루를 함께 보낸다.


  그러니까, 홍상수 감독의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두 에피소드 ‘지금은틀리고그때는맞다’와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누군가가 ‘한 줄로 말해달라’고 한다면 나는 아마도 저 두 줄의 문장이 각각의 에피소드라고 말할 것이다. 두 에피소드를 이렇게 말로 설명한다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조금 더 주의가 깊다면 ‘는’과 ‘가’의 조사처럼 사소한 형식의 차이가 있는 같은 내용의 이야기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은/는’과 ‘이/가’ 같은 조사의 차이는 사실은 사소한 차이가 될 수 없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와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가 결코 ‘섬에 핀 꽃이 그려진다’는 사실 만으로 같은 이야기가 될 수 없듯이. 반복되는 듯한 세계의 함춘수와 윤희정은 이렇듯 사소하지만 묵과할 수 없는 차이로부터 시작해서 완전히 지금을 만들어냈다. 


이 쪽 세계

  이 쪽 세계의 함춘수는 궁에서 우연히 만난 희정에게 관심이 있다. 희정 역시 춘수의 관심이 싫지는 않다. 함께 간 카페에서 희정은 춘수에게 모델을 했다는 이야기와 지금은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춘수는 그런 희정에게 그녀의 그림이 보고 싶다고 말한다. 희정은 자신은 약속한 일과를 딱딱 지키는 사람이라 지금 그림을 그리러 가야 한다고 말한다. 춘수는 희정과 함께 희정의 작업실로 간다.


  작업실에서 카메라는 무언가를 그리고 있는 희정을 잡지만 사실 춘수는 희정의 그림에는 관심이 없다. 그의 시선은 오직 그림을 그리고 있는 희정 만을 향한다. ‘방금, 아주 먼 곳으로 여행을 온 기분이 들었다.’는 춘수의 독백. 춘수의 시선에 희정이 무엇을 그렇게 빤히 보느냐고 되물었을 때 춘수는 그림을 본 척한다. ‘음 뭐랄까.. 앞으로 끊임없이 나아가려는 느낌이 들어요. 아주, 아주 좋은 그림이에요.’ 희정은 춘수의 말에 미소 짓는다. 그녀는 그 말이 자신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고 지인들과 만났을 때 이야기한다. 그러나 춘수의 말이 사실은 비어있는 말이었다는 걸, 희정이 알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희정을 바라보던 춘수는 ‘먼- 곳으로 여행을 온 기분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어떤 먼 곳을 가정해 보자. 춘수의 집과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서울은 지금은 ‘먼 곳’이지만 내일 돌아갈 곳이기에 ‘아주 먼’ 곳은 아니다. 이때, 평행 우주를 가정해 보면 어떨까. 그러니까, 춘수가 ‘아주 먼 곳으로 여행을 온 기분이 들었다’고 말하는 그 순간, 다른 우주의 춘수가 작업실에서 희정의 그림을 보고 있는 거다. 두 번째 막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 보여주었듯이. 


그쪽 세계

  다른 우주, 그러니까 그쪽 세계에서 희정과 춘수가 희정의 작업실에서 만났을 때, 카메라는 희정의 그림은 잡지 않는다. 때문에 희정이 그리고 있는 그림이 방금 전의 에피소드에서 그렸던 그림과 같은 그림인지 다른 그림인지 관객은 알 수 없지만 그 그림이 무슨 그림인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 진지하게 그림을 보던 춘수는 그림에 대해 묻는 희정에게 답한다. ‘훌륭해요. 훌륭한데..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기분이 들어요. 용감하지 않은 느낌?’ 희정은 춘수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도대체 저를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하세요?’ 속이 상한 희정은 옥상으로 바람을 쐬러 가고 춘수는 그런 희정을 조용히 따라간다. 처음으로, ‘이 쪽 세계’에서 등장하지 않은 장소가 ‘그쪽 세계’에 잡힌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두 세계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이 쪽 세계가 온전히 춘수의 시점으로 내레이션을 통해 마음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냈다면 그쪽 세계를 비출 때에 춘수의 내레이션은 들리지 않는다. 때문에 그쪽 세계의 춘수를 우리는 이 쪽 세계의 춘수와의 비교를 통해 짐작할 수밖에 없다. 그쪽 세계의 춘수가 희정을 처음 만났을 때, 춘수는 희정을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쪽 세계의 희정은 어딘가 공격적이고 또 지쳐 보인다. 이 쪽 세계에서처럼 바나나 우유를 마시고 있었지만 이 쪽 세계에서와는 달리, 몇 년 전에 담배를 끊었다는 그녀에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관객인 우리는 알 수 없다.


  희정은 계속해서 춘수에게 묻는다. ‘되게 함부로 말하시네요. 저를 뭘 안다고 말하세요?’ 그러나 여기서의 물음에 춘수는 그다지 당황하지 않는다. 상처받았다면 미안하다는 말만 되뇌일 뿐이다. 화가 난 희정을 달래주러 옥상에 간 춘수. 그리고 이 쇼트 이후에 상황들은 같은 장소를 전혀 다른 느낌으로 진행한다. 똑같이 회에 소주를 마시지만 희정을 향한 마음과 동시에 결혼한 사실을 고백하는 춘수와 그런 춘수를 향해 마음을 열고 미소 지으며 춘수가 주는 반지를 받는 희정. 수영의 찻집에서 이 쪽 세계에서 함께 앉아있던 원호가 그쪽 세계에서는 밖에 나가있고, 이 쪽 세계에서는 춘수가 결혼한 사실에 실망해 춘수를 외면한 희정이 그쪽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함께 나가자고 말한다. 그리고 술에 취한 희정과 춘수가 나갈 때에 희정에게 인사를 건넨다. ‘희정 씨는 참 예쁜 사람이에요.’라고. 추운 길을 함께 걷는 희정은 마치 이 쪽 세계에서의 그녀처럼 밝고 어려진 느낌이다. 



이 우주의 그가 다른 우주의 그녀에게 전하는 위로   

  첫 번째 이야기가 춘수의 1인칭 시점에서 미성숙하고 감정적인 사람이 우연히 만난 한 여자와 동행하고, 상처 주는 이야기였다면 두 번째 이야기는 1인칭과 3인칭를 오가는 시점에서 어떤 우주에서 그녀에게 상처를 준 그가 다른 우주에서 마음을 닫은 그녀에게 위로와 진심을 전한다. 때문에 첫 번째 이야기가 춘수의 이야기였다면, 두 번째 이야기는 희정을 위한 이야기로 읽혔다. 마치 이 쪽 세계의 미성숙하고 감정적인, 그래서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또 받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다른 평행우주에서의 위로를 주는 듯했다. 우리 우주에서 준 상처를 다른 우주에서 치유해 주고 우리 우주에서 받은 상처가 다른 우주에서 대신 위로받는 그런 상상.


  이 쪽 세계에서 춘수는 혼자 내려왔듯이 혼자 떠나지만 그쪽 세계에서는 자신의 영화를 보러 온 희정을 다시 만난다. 희정이 영화를 보는 동안 춘수는 서울로 올라갔을 것이고 희정은 혼자 수원에 남았을 것이다. 이 쪽 세계에서의 두 사람과 같이. 그러나 ‘섬에 핀 꽃’을 말하기 때문에 조사가 다른 두 문장을 같은 감각으로 읽을 수 없듯이, 떠나는 사람과 남겨진 사람이 동일하기 때문에 두 이야기를 같은 결말로 읽을 수는 없다. 다시 서울로 떠나는 춘수는 희정에게 ‘이런 감정 느낄 수 있게 해 줘서, 정말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남아서 그의 영화를 보는 희정의 손에는 춘수가 준 반지가 끼어져 있다. 춘수는 이제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혹은 잊고 있던 감정을 희정을 통해 느꼈고 희정은 춘수를 통해 어딘가에서 상처받아 닫혀있던 마음을 조금은 열었다. 

  영화를 보고 나온 희정의 앞에는 춘수와 인사를 나눌 때 내리던 하얀 눈이 가득 쌓여 있었다. 미소를 띤 희정은 옷을 여미고 눈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녀에게 춘수와의 시간은 눈처럼 잠시 내리다 그치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간을 밟으며 그녀는 다시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 눈이 전부 녹을 때 봄이 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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