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만일의 세계> 리뷰
“만일.”
“저기, 저 해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저게 사실은 해가 아니라 구멍인거야. 이 세계와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구멍. 저 주위를 봐, 빨갛잖아.
아,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한 사건에는 그 사건이 만들어지기까지의 무수한 우연들이 있다. 말하자면 모든 사건들은 그것의 크기가 크건 작건 간에 모두 별 것 아닌 일들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때문에 무심코 지나쳤던 일이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는 절대 알 수 없다. 이를테면 연인과 함께 산 중턱에서 노을을 본 것. 그저 많고 많은 데이트 중 하루였을 뿐인 이 날을 돌아봤을 때, 만일은 깨닫는다. 여기에서부터 잘못되었던 거라고. 그 날, 둘이서 노을을 봤을 때 우리는 분명 다른 세계로 와버린 거라고. 만일은 쓸쓸하게 되뇌인다. 그 날, 그렇게 뚫어져라 해를 바라보는 게 아니었는데.
그러니까, 만일의 이야기를 재미있어 하던 주희가 더 이상 만일의 말에 웃지 않게 된 것도, 만일의 모든 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게 된 것도, 모두 그날 다른 세계로 와버렸기 때문이다. 혹시나 그날 봤던 그 노을을 같이 다시 보면 우리가 속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만일은 간절하게 그 장소를 찾는다. 자기소개서를 쓰다가 내키지 않게 끌려나온 연인, 주희와 함께.
그러나 숲을 아무리 뒤져도 그 시간 속의 그 장소는 찾을 수가 없다. 산을 타다가 우연히 만난 동네 형은 여자 앞에서 이상한 춤을 추고 있다. 이유를 묻는 만일에게 형은 속삭인다. 만일은 주희에게 형의 말을 전한다.
“여기는 다른 세계래. 그러니까 여기에서는 춤을 추는 일은 금지된 일이래. 춤을 추다가 죽을 수도 있대. 그러니까 이 세계에서 춤을 춘다는 건 아주아주 위험한 일인거야.”
“..... 너랑은 말이 안 통해.”
당장의 자기소개서를 쓰는 일이 급한 주희는 냉소한다. 주희가 냉소할 때면 만일은 초라해진다. 괜히 미안해서 자꾸 눈치를 보는데 눈치를 보는 것조차 주희는 싫어한다. 만일은 주희를 위해 준비한 선물을 내민다. 선물은 그동안 지켜본 주희의 모습을 담아 쓴 그녀의 ‘자기소개서’. ‘그래도 너한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썼으니까 거짓말은 아니’라며. 그는 그녀의 자기소개서를 천천히 읽는다.
“저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다정함을.. 다정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스튜어디스를 꿈꾸던 주희를 만일은 기억한다. 작은 일에도 기쁨을 찾던 주희를, 자신의 이야기에 즐겁게 웃어주던 주희를, 어떠한 상황에서도 다정함을 잃지 않으려던 주희를 기억한다. 주희는 만일이 읽어주는 자기소개서에 울컥한다.
“만일아. 이렇게까지 안해도 돼.”
하지만 만일은 포기하지 않는다. 꾹꾹 참으며 자기소개서를 읽고 우리가 행복했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마지막 희망으로 다시 산을 걷는다. 주희도 이제는 아무 말도 없이 만일을 따른다. 그들이 겨우겨우 도착한 곳은 처음에 지나쳤던 그 곳이었다. 거기에서 해는 지고 있지만 예전에 함께 봤던 노을과는 다르다.
“날이 흐리네..” 만일은 맥이 탁 풀린다. 그런 만일에게 주희는 하루 종일 하지 못했던 그 말을 뱉으려 한다.
“너도 내가 무슨 말하려고 하는지 알고 있잖아”
고개를 숙인 주희, 고개를 숙인 만일. 그리고 정적. 만일은 고개를 숙인 채로 춤을 춘다. 팔 다리를 흔들며, 어디서 왔는지 알 수도 없는 춤을 열정적으로 춘다.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춤을 통해서. 이 세계에서 금지된 일인 춤을, 나의 모든 것을 걸고 너를 위해 춘다고. 그러나 어느 누가 헤어짐 앞에서 춤을 출까. 우스우면서도 슬프고 슬프면서도 찌릿하다. 그 역시도 알고 있었다. 듣지 않으려했지만 알고 있었다. 연인이 이별을 말할 것이라는 걸. 이별이라는 게 어디 ‘헤어지자’ 따위의 짧은 문장에서 오는 일이었던가. 그저 알 수 있는 것이다. 시덥잖은 이야기를 시덥잖게 듣는 너의 표정에서, 보고싶어 기다리던 나를 대하는 당신의 말투에서, 바라보는 눈빛의 온도에서 이미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세계에는 여전히 당신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세계가 끝났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을 뿐. 그래서 만일은 이별을 말하는 주희 앞에서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 않고 춤을 춘다. ‘너를 위해서라면 내 세계를 버릴 수 있어’라는 간절한, 그러나 소리없는 외침을.
‘그가 나를 부른 순간, 나는 그에게로 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시, 「꽃」은 몸짓과 인식에 대해 말한다. 당신이 나를 인식하기 전에 나는 그저 소리없는 몸짓일 뿐이었지만 당신이 부름으로써 나는 당신에게 가서 꽃이 되었다고. ‘불려짐’으로써 나는 꽃이 되었다. 그러나 당신이 부르지 않았다면, 인식하지 않았다면 그저 몸짓일 뿐이다. 몸짓이 꽃이 되었듯, 한 때 꽃이었던 몸짓은 다시 들리지 않는 몸짓으로 남을 것이다. 영화 <만일의 세계>는 이별을 앞둔 연인을 통해 몸짓과 인식, 그리고 이별을 보여준다. 만일이 이별을 말하려는 연인을 잡는 방법은 ‘너를 보낼 수 없다’거나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말이 아니었다. 애써 외면하는 눈빛과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공간에 대한 연민, 그리고 모든 것을 걸고 추는 춤을 통해서였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팔다리를 마구 흔드는 만일의 우스꽝스러운 춤이 우습지 않은 이유는 뭘까. 이 장면만을 본 사람이라면 웃을 춤인데, 우스움보다도 연민이 뒤섞인 슬픔이 앞선다. 아마도 이별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라도 잡고 싶은, 간절한 만일의 마음을. 그리고 그 춤이 두 사람의 이별을 막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도.
그러나 만일의 세계에 아직 주희가 있다면, 당신의 세계에 아직 내가 있다면, 나의 춤은, 우리의 이별은 어떠한 식으로든 당신에게 각인되리라. 언젠가 또 다른 사람을 만나서 또 다른 이별을 하더라도 그 이별의 순간에 나의 춤이 당신의 뇌리를 스친다면, 그와 동시에 함께 보던 그 날의 노을이 잠깐이라도 망막에 머무른다면. 당신이 우리가 함께였던 세계를 기억해준다면 그것 만으로도 의미있지 않을까. 춤은 몸부림. 나의 몸부림이 당신에게 나를 마지막으로 인식시켰기를, 만일은 소망했다. 만일의 세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