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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사월 Jul 10. 2022

사랑은 아니야, 추앙이겠지

03번째 필름 - <나의 해방일지> 누군가의 시점


선배, 손가락이 참 가늘고 기네요.


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요? 없었던 거 같지만 아마 있었더래도 선배는 푸석한 얼굴로 피식 웃고 넘겼겠죠. 선배는 자기한테 하는 칭찬은 뭐든 흘려듣는 사람이니까. 덤덤한 내 말투가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면 꼭 한마디 더 했을 거예요. ‘엄마는 이 손이 일 안한 손이라서 그렇대. 학교 다닐땐 쌤들이 꼭 그러더라. 연필 한번 제대로 안 잡아본 손 같다구. 난 집에서 일도 죽어라고 하고 공부도 그렇게 했는데. 다들 알지도 못하면서.’ 무심결에 여기까지 말을 뱉어버리면 선배는 곧 아차 싶은 표정이 됩니다. ‘내가 말이 너무 많지?’ 그리고 살짝 웃으며 입모양으로 대신 말하는 ‘미안해’. 

아니라고 말해도 선배는 이미 자기만의 답을 내리고 다시 돌아보지 않았겠죠. 선배의 말에 내 리액션이 조금 늦었던 건 지루해서가 아닌데. 조용한 선배가 가끔 마음에 있는 말을 쏟아낼 때,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먼 곳을 보면서 말할 때, 1분에도 17번씩 바뀌는 그 표정을 바라보는 게 좋아서였는데. 


긴 손가락으로 선배는 느릿느릿 키보드를 눌러요. 왜 다들 일할 때는 키보드를 천천히 누르다가도 컴카톡으로 친구들한테 상사 욕을 할 때나 애인이랑 몰래 떠들 땐 타자 소리가 빨라지잖아요. 그냥 딱 봐도 쟤는 지금 여기 없구나 싶어질 만큼. 그런데 선배한텐 그런 순간이 없어요. 팀장한테 부당하게 혼나고서도. 편들어주는 척 묘하게 소외시키는 대리들에게 억지웃음 지으면서도. 선배는 어디 이를 데도 없어요? 선배보다 더 힘없는 내가 분해서 몰래 편들면 선배는 또 힘없이 웃으면서 ‘괜찮아’라고 말해요. 이런 것쯤은 내가 선배 나이가 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인 것처럼. 사실 괜찮은 건 아니잖아요. 정말 아무렇지 않은 일이었으면 선배가 매일 조금씩 더 침식되는 표정으로 그 자리에 있진 않았을 거예요. 괜찮지 않은 일을 자꾸 괜찮은 척 넘기다 보면 마음에 병이 되는 걸, 그게 선배가 고르는 색과 디자인에도 묻어나는 걸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알 수 있어요. 나는 선배 그림 정말로 좋아하니까. 


왜 하필 손가락이었을까. 보통 누구의 무엇에 각인되는 건 눈이라던가 입술이라던가 하는 이목구비인 거 같던데. ‘왜’는 몰라도 ‘언제’는 알 수 있어요. 팀장의 지랄이 유난히 심했던 날이 있었죠. 그날의 타깃은 나였고, 하필 난 처음 피드백 받는 날이었어요. 색감이 올드하네, 센스가 없네, 디자인실이 답이 없다고 한참을 호통치다가 나를 선배한테 보냈죠. 짐덩이 넘기듯. 

무너진 자존심에 바닥만 보고 있는데 선배의 손가락이 팀장이 그은 내 시안 속 빨간 줄들을 천천히 훑었어요. 그러고는 그 빨간 줄에 다시 줄을 그었죠. 그리고 내 의도를 살리는 방향으로, 하지만 팀장에게 수정했다는 표시는 확실히 줄 수 있게 피드백을 해줬죠. 선배는 다른 사람들처럼 팀장이 쓰레기라고 욕하지도 않았고, 날 달래주지도 않았어요. 그런데도 시안을 읽어가던 그 손이 계속 생각났어요. ‘그런 사람의 말 신경 쓸 것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다음부턴 선배가 그 손으로 그리는 시안들을 봤죠. 무채색의 선배가 담는 색, 패턴 없는 선배가 쓰는 패턴. 조용한 사람이 이렇게 과감한 터치도 하네. 트렌드에 무심해 보였던 사람이 이런 아이디어도 내네. 이 사람은 보기보다 단단한 사람이구나. 악의라는 게 그런 사람조차도 마모되게 만드는 건 줄은 그땐 몰랐죠.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알 수 있었어요. 선배에게 누가 생겼다는 거. 괜히 핸드폰을 자꾸 보다가 웃는 것도. 야근하고도 가볍게 일어나는 것도. 그 사람은 알아요? 선배가 어떤 그림 좋아하는지? 야근할 땐 무슨 음악을 듣는지, 회사에서 매일 어떤 모욕을 견디는지, 평소보다 조금 기분이 나을 때면 어떤 웃음을 짓는지. 알 필요도 없겠죠. 긴 카톡에 달랑 답장 한 줄 와도 선배가 이렇게 기뻐하는데. 좋은 일인데 심장이 철렁해요. 선배가 이젠 더는 주는 사랑 말고 받는 사랑했으면 좋겠는데. 사랑이 아니라고요? 그럼 뭐예요. 추앙이라고요? 또 또 그런다. 제발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말아요. 


선배를 향한 내 감정이 뭔지 나는 종종 헷갈려요. ‘동경’은 너무 멀어요. ‘롤 모델’은 너무 정 없어. ‘존경’은 너무 수직적이지만 또 ‘우정’처럼 평등하지는 않아요. 이런 마음을 뭐라고 할까요. 이게 선배가 한다던 ‘추앙’일까요. 거봐, 선배 때문에 내가 이런 말까지 써요. 생각해 보니까 억울하네. 그동안 내가 한 게 그거면 선배는 왜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한테서 그걸 구해요. 몰랐는데 생각보다 바보네요. 


그냥 나는 선배 편이에요. 어떤 선택을 하든 선배를 믿어요. 왜 누가 돈을 훔쳤대두, 사람을 죽였대두 ‘그 사람 그럴 사람 아니에요. 사정이 있었겠지’하는 주변인 있잖아요. 나는 그런 사람이야. 무조건적으로 당신 믿고 응원하고 편드는 사람. 만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 사람 만나면서 얻은 빛까지 잃지는 않길 바래요. 혼자서도 충분히 빛나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래도 그러다 지치면 한번쯤은 먼저 술이라도 먹자고 하고 그래요. 걱정 마요. 사랑은 아니야. 굳이 이 감정에 라벨을 단다면, 그래. 추앙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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