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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시월 Aug 03. 2021

타인이 내 입을 막는 것보다, 유일하게 더 나쁜 것

로-옹 에세이


 ‘뚱뚱한 게 예민하기는.’이라는 말이 유행이었던 때가 있었다. 

 소년들은 불만을 얘기하는 소녀들에게 그 말을 하며 놀려 댔다. 저체중인 소녀들만이 그 말에 낙인찍히지 않고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게 허용되었다. 나는 저체중이 아니어서 놀림을 피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잔뜩 움츠렸다. 난 내가 예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예민하지 않게 보이기 위해서 예민하다는 놀림을 듣는 아이들이 하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점차 적어졌다. 


 소년들이 학원차가 떠나가게 소리를 질러도 참아야 했고, 교실에서 하는 공놀이에 공을 맞아도 괜찮다고 웃어야 했고, 내 옷차림을 놀려도 기분 나쁘다는 걸 드러내지 않아야 했다. 많은 시간이 되었지만 여름날 학원차에 가득 찬 아이들 틈에서 어떻게든 낙인찍기를 피하려고 숨죽이고 창밖만 보던 시간들의 불안감이 아직도 선명하다.  

 예민함을 참고 드러내지 않는 게 미덕이라고 하는 건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드러날까 봐 조마조마하게 억눌러온 예민함은 긴 시간 동안 과민함으로 발전했다. 어떤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더 생각하게 된다는 과학의 발견을 몸소 체험한 거다.

 

  예민하다와 과민하다 사이의 선을 넘었다는 명확한 기준 같은 건 없다. 내 기준은 이랬다.

 '예민해지지 않았던 것들에까지 예민해질 때.' 도수에 맞는 안경을 쓰고 세상이 너무 선명해 보이는 것처럼 모든 게 너무 많이 느껴지는 것이다. 과민함은 몸으로 깨닫게 되는 심연이다. 심연이라는 말은 좀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이다. 과민함은 일상을 심연으로 끌어들인다. 



 지하철을 타지 못 했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배가 아프고 속이 메슥거리는 걸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던 게 계기였다. 그 후로 지하철을 타기 전에는 음식을 먹지 않거나 꼭 화장실을 다녀왔다. 버스는 전부터 멀미가 있었는데, 한두 시간 버스를 타는 게 필생의 도전이 느껴질 정도가 됐다. 그러다 보니 외출을 거의 안 하게 됐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두려워졌다. 갑작스럽다는 게 가장 불안했다. 괜찮다가도 갑작스레 배가 아프고 속이 메스꺼워진다. 그런 증상이 나타나게 하는 음식들을 하나하나 소거해 나가다 보니 외식은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외식으로 먹는 음식들은 속이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게 거의 없었다. 음식점이나 카페에서 내 주문은 점점 까다로워졌다. 온도 변화에도 과민해서 여름에 밖에 나가면 에어컨과 최대한 떨어진 자리를 찾거나 겉옷을 가지고 다녔다.  



 그러면서도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숨기려고 노력했다. 나는 예민한 사람은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하나하나 신경 쓰게 하는 예민한 사람보다는 무던한 사람을 좋아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가족들도 내 성격을 싫어했고, 그게 화가 나면서도 수긍되었다. 나조차도 예민한 나와 헤어지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나는 약국 단골손님이 되었다. 내가 다니는 거점마다 들르는 약국이 있었다. 주로 소화제나 과민성 대장증후군 약, 알레르기 비염약을 구입했다. 중요한 술자리가 있으면 혹시 모르니까 지사제도 챙겼다. 약이 가방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정감이 있었다. 세네 가지 약을 가방에 챙겨 넣으면서도 병원에 가보겠다는 마음은 먹지 못 했다. 위내시경 검사를 하다가 의사에게 토할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은 건 최악의 증상들이 지나간 후였다. 



 과민해지면 나를 믿을 수 없게 된다. 내가 느끼는 걸 의심하고 정상적인 사람의 기준을 알아내고 거기 맞추는 데 집착한다. 화낼만한 일이 있어도 내가 과민한 건가 의심해 보게 된다. 그렇게 내 느낌을 무시하다 보니 점점 마음을 느끼기 어려워졌다. 에어컨 온도 변화는 귀신같이 맞추면서, 내 감정 변화는 눈치 채지 못했다. 내가 슬픈 건지, 화가 난 건지, 우울한 건지도 명확하게 느껴지지 않고 흐릿하기만 했다. 

  내 몸은 더 말이 많아졌고, 마음은 침묵했다. 내 세계는 계속 움츠러들고만 있었다. ‘뚱뚱한 게 예민하기는’ 하고 핀잔을 줄 소년들은 이미 내 옆에 없었는데, 혼자 계속 학원차 구석에 앉은 채 불안해하는 느낌으로 매일을 견뎠다. 



 지금은 많은 노력과 고마운 사람들의 도움으로, 덜 예민해져서 과민하다고 느끼기 전 상태에 가깝게 돌아와 있다. 지하철도 타고 버스도 타고 커피도 마신다. 과민함을 겪고 나서야 움츠리고 있는 내가 아니라 나를 움츠러들게 하는 세상이 보인다는 건 재밌는 일이다. 



 그때 학원차에서 ‘뚱뚱한 게 예민하기는’ 하는 놀림을 받는 건 소녀들뿐이었다. 소년들은 표적이 되지 않았다. 한 소년은 자신보다 저체중인 소녀에게 그 말을 하며 놀려댔다. 어떤 상황에서 놀림이 있었는지 생각해보면, 대부분 소녀가 소년의 괴롭힘에 반발할 때였다. 

 

 어쩌면 타인에 대해 '예민하다.'라고 낙인찍는 행위는 스스로를 착한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서가 아닐까? 

자신이 누군가를 괴롭힌 나쁜 아이라고 느끼기가 싫어서 저항하는 상대방을 예민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상대방이 예민하게 받아들인 거라고 하면 잘못한 사람은 내가 아니게 된다. 자신이 저지른 둔감한 실수, 잘못을 부정하고 그 사실을 말하는 사람의 입을 막기 위해서 예민함은 부정적인 낙인이 되어야만 했다.

 권력은 원하지 않는 목소리를 막는 힘이다. 그러니 학원차 안에서 나와 다른 소녀들을 움츠러들게 한 건, 권력의 불균형이었다.


  

 나도 때로는 그런 마음이 든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 한 부분에서 상대가 불편함을 얘기하면 그가 예민한 거라고 믿고 싶다. 그게 편하다. 내 실수와 잘못을 직시하고 산뜻하게 인정하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다짜고짜 ‘네가 예민한 거다.’라고 속단한다면 문제는 그대로인 채 한쪽은 계속 둔감해지고 다른 쪽은 과민해진다. 소통은 그런 식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결국 소통이라는 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데 기반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노팅힐>을 볼 때마다 불편한 장면이 있다. 남자 주인공 휴 그랜트가 친구의 소개로 만난 여성을 희화화하는 장면이다. 그 여성은 과일주의자-땅에 떨어진 과일만 먹는다-라서 휴 그랜트의 친구가 요리한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해서 식사자리를 싸하게 만든다. 여자 주인공 줄리아 로버츠가 같은 상황에서 채식주의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고기 요리를 먹었던 장면과 대비되며 그가 스타지만 예민하지 않고 배려 깊은 여성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그 과일주의자 여성에게 감정 이입했다. 식사자리를 싸하게 만드는 그 느낌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식욕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고 지켜져야 하는 인권이다. 내가 뭘 먹고 싶고, 무엇을 먹기 싫은 지 밝히는 게 그렇게 배려 없는 행동일까? 물론 코미디라서 과장되게 표현되었을 것이고, 서사에 필요한 장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두 여성 캐릭터를 대비시키는 ‘배려’라는 미덕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예민함의 반대말은 둔감함이 아니라 배려다. 그리고 많은 경우 배려는 여성에게 강요되는 미덕이며 침묵의 뜻을 담고 있다. 

 


 내 욕구보다 타인의 욕구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고 배려하는 사람이 많다면 사회는 지금보다 더 좋아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배려라는 미덕이 특정한 사람들만을 억압하는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런 사회에서는 억압받는 사람들이 내 욕구에 예민하고 반응하고, 나를 배려하며, 내가 느끼는 불편한 마음을 침묵하지 않는 행동이 발전을 만든다.


   

 우리 사회는 더 과민해져야 한다. 다수의 편의, 권력자의 취향이 과민함의 기준을 정하지 않게 질문하고 답해야 한다. 존중받을 권리를 다수와 권력자에게만 주는 사회의 결속력은 나약할 수밖에 없다.   

 타인이 내 입을 막는 것보다 유일하게 더 나쁜 것은 내 입을 내가 막는 것이다-생각하지 않고 말하라는 뜻은 아니다. 


 과민함은 내 전부가 아니다. 내게는 다른 면들이 많다. 하지만 과민함 또한 내 일부분이다. 나는 자신이 ‘과일주의자’라는 것을 밝힌 그 여성 캐릭터가 배제받을 위험을 감수하고 스스로를 드러내기를 꺼리지 않았음에 탄복한다. 내가 과민함을 드러내서 실제로 해칠 가능성이 있는 건-그게 불편하다고 호소하는 타인이 아니라-내 사회적 평판이다. 그는 자신의 일면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배제될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고 말한 것이다. 그러니 과민함은 나약함을 뜻하지 않는다. 과민함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사회에서 그런 면을 숨기지 않는 건 용기 있는 행동이다. 



 여름날 학원차 구석자리에 앉아있던 나에게로 되돌아가 본다. 우두머리 격의 소년이 자신의 장난에 반발한 소녀에게 비아냥거린다. ‘뚱뚱한 게 예민하기는.’ 그 소년은 목소리가 크고, 원하면 누구든 낙인찍을 힘이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용감하지 않다. 그에게 예민함과 뚱뚱함이 왜 비난거리가 되는지 나서서 질문하는 사람이 용감한 사람이다. 무례한 '장난'에 반발한 그 소녀가 용감한 사람이다. 

 그때 학원차에는 용감한 아이가 더 없었고 낙인찍기는 계속되었다. 나는 그 낙인찍기에 질문을 가졌지만, 말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내게는 움츠린 몸을 곧게 펴고 질문을 던질 용기가 가끔은 있고, 자주 없다. 용감하게 질문하는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다. 우리 사회에도,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그러기를 원한다. 여러분에게 내가 품고 사는 질문을 건넨다. 그 사람이 과민한 게 아니라, 내가 둔감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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