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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시월 Sep 01. 2021

취향

초단편소설 - 한페이지 단편소설 vol.10. 수록작




내가 넘어오나 안 넘어오나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예쁜 애가 날 좋아할 리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 애가 내게 사귀자고 말하는 그 순간에도 그 애를 마주 보기보다는 그 애 뒤에 숨어서 이 장난을 훔쳐보고 있을

그 애 친구들을 찾아 담벼락 뒤를 살폈다. 하지만, 그 애의 말은 진심이었고 우리는 벌써 100일을 맞이하고 있다.

아직도 그 애와 함께 다닐 때면 내게 꽂히는 시선에 익숙하지 않지만,

함께 영화를 보고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고 그 애를 집에 데려다주는 일이 어색하지 않아졌다.


 물론 그 애에게 물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왜 나를 좋아하는지, 그건 내가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 애는 내가 자기 이상형이라고 말했다. 진지하게 그렇게 말하니 장난이냐고 묻지는 못하고 내 어디가 그 애 이상형이냐고 물었다.

그 앤 사소한 거라며 끝내 말해주지 않았다.



 100일 선물로 그 애에게 뭘 해주면 좋을까 고민했다. 근사한 식당에서의 식사와 그 애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케이크, 내가 해줄 수 있는 가장 값비싼 선물인 14K 커플링. 그리고 그 애가 창피하지 않도록 한껏 차려입고 신발엔 평소보다 두꺼운 깔창 깔기. 그래도 그 애 옆에 설 남자로는 부족했다.

 키를 더 키울 수도 없고 성형수술할 돈도 없는 난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바꾸기로 했다.

 내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인데다 튀어서 그 애가 밖에서 날 부를 때면 주저하며 작게 이름을 부르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개명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커플링 안쪽에 그 애의 이름과 내 새 이름을 새겼다.



 우리의 100일은 계획대로 잘 흘러갔다. 그리고 대망의 선물 전달. 커플링을 본 그 애의 얼굴에서 감동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애에게 커플링 안쪽에 새겨진 이름을 보라고 했다. 그 애에게 이름을 바꿨다고 얘기했다. 오직 널 위해서. 커플링 안쪽을 보고 그 애는 말이 없었다. 그 애에게 지금껏 많은 남자가 값비싼 선물을 했겠지만, 이 커플링처럼 이름의 무게가 담긴 선물은 없었을 테니까 당연했다.

 널 위해서라면 뭐든지 바꿀 거야. 다시 한번 그 애의 마음에 쐐기를 박기 위해 덧붙여 말했다. 그러자 그 애가 고개를 들어 날 봤다.

 그 애의 눈에 지금껏 보지 못한 일렁임이 담긴 게 보였다. 오늘 드디어 키스해도 되는 건가. 속으로 상상을 하며 그 애의 입술을 봤다. 내가 좋아하는 핑크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다. 그 애도 준비한 모양이었다. 그 애의 입술이 움직였다. 난 네 이름이 좋았었는데. 그 애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애가 커플링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그만 갈게.



 그 애의 팔을 잡았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그 애에게 다그쳐 물었다. 그 앤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넌 날 왜 좋아하니. 대답은 생각하기도 전에 곧장 나왔다. 왜 좋아하냐니. 좋아하니까 사귀고 있지. 그 애가 날 빤히 봤다. 내가 사귀자고 했을 때 우린 말 한 번 안 해본 사이였어. 그 애의 말을 들으니 혈압이 확 올랐다. 그러니까, 네가 먼저 사귀자고 해놓고 갑자기 이러니까 내가 빡치는 거잖아. 그 애는 자신의 팔에서 내 손을 떼어내고 말했다.

 넌 내 얼굴이 좋아서 사귀겠다고 한 거잖아. 그것처럼 난 네 이름이 좋아서 사귀자고 한 거야. 그 애가 말을 마치고 걸어 나갔다.

 지금은 그 애를 좋아하는 이유를 그것 말고도 한없이 많이 댈 수 있는데 그걸 말해줄 수가 없었다. 그 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내 이름만을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그것으로 끝이었다.







저에 대해서 조금만 더 말하자면:

이런 걸 해보고 싶어서 작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할 수 있게 되니까 망설여지더군요.

위 두 문장에 저의 핵심이 들어 있습니다. 한페이지단편소설이라는 공간에 대해 알게 된 건 꽤 되었지만 차마 글을 올릴 용기를 내지 못했었습니다.

글을 올리고 나서도 안 될 거라고 계속 생각했었죠. 저와 같은 분이 계신다면, 글쓰기 버튼을 누르시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저도 다시 한번 글쓰기 버튼을 누르기가 망설여지지만요. '취향' 덕분에 글쓰기 시작하고 처음으로 동생에게서 잘 썼다는 얘기를 들었네요.

동생은 문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물론 평론가도 아니지만, 그런 가족의 지지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원하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이 소설은 한단설 서포터즈의 후원으로 <한페이지단편소설> 사이트에서 펴낸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입니다.

테마 소설이 '가정식 백반'을 주제로 한 소설들이었고, 제가 쓴 소설은 자유주제였습니다.

2012년 1월 26일에 펴낸 책이네요.

2021년에 다시 읽으니 감회가 새로워요. 비문도 많고 '그 애'라는 표현이 매우 많이 들어갔지만, 애착이 가는 작품입니다.

수정 작업을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2012년의 제가 최선을 다해 쓴 글을 기억해두고 싶어서요.


이때 처음 제 글을, 알지 못하는 분들의 후원으로 출판하게 되었었죠(감사합니다!).

주제로 잡은 '이름'도 의미가 있었습니다. 본명이 독특해 어딜 가든 이름이 눈에 띄는 사람으로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많이 생각한 주제였거든요.




소설을 수록할 때 쓰게 되어있었던 자기소개글을 읽으니 웃음이 납니다.

그때의 저는 스스로를 '평범한 사람'이라고 표현했었군요.

지금은 드라마 <청춘시대> 속 대사처럼, '평범 이하'라는 표현이 더 와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알면 알수록 한국 사회의 바닥은 깊고 깊어서 '평범'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 소설을 썼을 때는 '평범'의 기준이 훨씬 단순했던 것 같아요.

팬데믹 상황이 거의 2년째 '평범'한 일상이 되어버린 것도 그렇고...

좀 더 기준이 복잡해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런 기준 같은 건 없었을까요?

제가 나이가 더 들어서, 어둠을 좀 더 보게 되어서 복잡하게 보게 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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