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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준가 Dec 08. 2021

나는 왜 장롱이 되었는가?


이쯤에서 내가 장롱면허가 된 이유를 적어보고자 한다. 어쩌다가 면허를 따고 17년이나 그대로 묵히게 되었는지, 왜 운전을 하지 않고 장롱이 되었는지, 그럴 거면 도대체 왜 면허를 땄는지! 우선은 왜 운전면허를, 그것도 시험도 어렵고 쓸 일도 많지 않은 1종 보통면허를 땄는지부터 얘기해보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얼떨결에 땄다. 조금 더 정확하게는 떠밀려서 땄다. 주변에서 따라고 따라고 잔소리들을 그렇게 했다. 이 잔소리는 수능을 친 직후부터 들렸는데, 정확하게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또래 남자들을 향한 말이었다. 이미 대학을 간 선배들은 수능이 끝나고 할 일 없이 느적거리는 아이들에게 그때 운전면허를 따놓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여자아이들에게는 잘 하지 않는 조언이었다. 그런 말을 어깨너머로 들으면서, 나도 따야 하려나 생각도 했지만 그때는 운전을 하고 싶지도, 할 생각도, 할 기회도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때 나는 청소년 축제를 만든답시고 친구들과 동아리 활동을 하며 쏘다녔다.  




운전면허를 따겠다고 공부를 시작한 건 대학 4학년 때였다. 당시 나는 동네 교회의 유치부 교사로 봉사하고 있었는데, 그 부서 안에서도 맡은 일은 차량봉사였다. 유치부 아이들은 3세~7세까지로 세상 조그맣고 귀여운 애기들이다. 7세 정도의 큰 아이들은 집이 가까운 경우 혼자 오기도 하고, 어떤 아이들은 부모가 교회에 오면서 데리고 오지만, 어떤 아이들은 선생님이 데리러 가야 했다. 교회에서는 데리러 가야 하는 아이들의 집을 모두 연결해 동선을 짜고, 양육자와 시간 약속을 해서 아이들을 차로 데리러 간다. 이런 차량봉사에는 두 명의 성인이 필요하다. 운전하는 사람과 문을 열고 아이들을 태우고 문을 닫는 사람. 그 문을 열고 닫는 사람이 나였다. 흔히 볼 수 있는 노란 유치원 버스와 비슷한 시스템이다. 그걸 교회 소유의 봉고차로 운행하는 거다. 차량봉사를 맡으면 다른 교사들보다 훨씬 빨리 출근해야 했기에 보통은 교사들이 돌아가며 맡았는데, 이상하게 나는 그걸 참 오래도 했다. 성실하게 해서 계속 시킨 건지, 다른 교사들보다 내가 젊어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나와 파트너를 이루어 그 차를 운전하는 집사님은 아버지 뻘의 남성이었다. 그분은 내가 마음에 드셨던 건지 단지 자기의 짐을 빨리 내려놓고 싶었던 건지, 나에게 운전을 시키고 싶어 했다. 빨리 필기시험을 보라며 재촉해서 시험을 봤다. 필기에 합격하자 이번에는 기능을 알려준다며 원래 출근 시각보다 30분 일찍 나를 한강으로 불러서 운전을 가르쳤다. 얼추 몇 가지 기능을 가르친 다음에는 운전학원에서 패키지로 수강을 하지 말고 시간별로 수강권을 끊어서 강습을 받으라고 했다. 말하자면 운전면허시험 컨설팅을 해주신 것이다. 당시 면허학원의 패키지 수강료는 65~70만 원 정도였는데 그만한 돈이 내게는 없었다. 이 저렴한 컨설팅에 혹할 만했다. 


필기시험이야 문제집을 한번 쭉 훑어보면 합격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기능은 완전히 차원이 달랐다. 게다가 그때 내가 도전하던 종목은 1종 보통면허였다. 교회 봉고차를 몰려면 당연히 1종 보통이어야 했고, 또 당시까지도 스틱 차량이 꽤 많이 돌아다녔기에 "남자라면 1종이지!" 같은 말이 또래들 사이에 돌았다. "뭐 남자면 1종? 여자도 1종이다!"의 느낌으로 여자들도 1종을 따는 게 멋있다는 기류가 있었다. 


1종 보통이란 무엇인가, 스틱이다. 스틱은 무엇인가, 수동식 기어를 말한다. 운행 속도에 따라 기어가 1단에서 6단까지 올라가는데 그게 딱딱 정해진 것도 아니고 대략 운전자의 감으로 변속해야 하는 거라서 영 어려웠다. 게다가 이 기어는 브레이크와 액셀을 밟는 오른쪽 발이 아닌, 왼쪽 발에 위치한 크러치라는 페달을 따로 밟아야 바꿀 수 있다. 크러치와 브레이크, 액셀의 절묘한 합이 또한 중요해서 여차 하면 차가 덜컹거리며 시동이 꺼졌다. 그러니까 양쪽 손과 양쪽 발과 눈과 머리가 제각각 따로 놀면서 이리저리 차를 움직여 T자 코스도 가고 S자 코스도 가고 평행주차도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정말 그 연습을 하면서 돌아버릴 뻔했다. 손, 발, 머리가 모두 다 빙빙 도는 느낌이었다. 몸의 어디에도 이 연습과 경험이 착착 쌓이지 않고 그저 투명인간이 된 것처럼 흘러서 사라져 버렸다. 이 훈련을 체계적으로 받아도 될까 말까인데 심지어 나는 컨설팅을 받은 대로 학원의 시간별 수강권을 끊어 찔끔찔끔 연습하고 시험을 봤다. 학원 연습 코스에서 모의시험 합격을 받은 뒤 진짜 시험에 도전했는데, 결과는? 당연히 낙방. 떨어질 각오야 미리 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많이 반복될 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기능시험을 대략 열 번쯤 떨어졌다. 이쯤 되면 시험이 아니라 시험장에서 연습을 한 셈이다. 내 원서에 더 이상 인지를 붙일 자리가 없을 즈음, 겨우 기능시험에 붙었다. 마지막 시험이 아직도 생생하다. 평행주차를 마치고 돌아 나와 직진하다가 오른쪽 깜빡이를 켜고 마침내 결승선을 통과했을 때의 기분은, 정말이지 후련했다. 그때 시험관리요원이 잔뜩 얼어 있는 나에게 다가와, 이제 긴장을 풀어도 된다는 듯한 말투로 "시험 끝났습니다. 시동 끄고 내려오세요."라고 한 말도 기억이 난다. 드디어 해냈다는 감흥은 잠깐, 이 지긋지긋한 기능시험장에 이제 안 와도 된다는 사실이 기뻤다. 시험 비용으로 거의 면허학원 패키지 금액만큼을 쓴 뒤였다. 


그렇게 어렵게 합격해 연습면허를 받고 주행 연습을 하고 주행시험을 또 두 번이나 봐서 얻은 귀한 면허였다. 하지만 그 기간이 너무 길었던 탓일까? (길긴 길었다.) 그 사이 나는 유치부 차량봉사를 그만두고 찬양봉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봉고차에 탈 수 없었다. 나를 재촉하던 집사님과도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면허를 따고 아버지 차로 한두 번 동네를 돌아보긴 했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누구도 나에게 자기 차를 빌려주지 않았고 사실 나도 간절히 원해서 딴 면허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운전을 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일단 땄으니 된 거였다. '운전면허 따기'라는 1차 목표를 힘들게 이루고 나니 그다음을 생각할 여력이 남지 않았다. 나중에 언젠가 운전할 기회가 있겠지. 


그렇게 17년이 흐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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