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뭘 샀냐면
앞에서 모닝이니 스파크니 아반떼, 셀토스 등등 마치 차를 잘 아는 것처럼 써놨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아반떼와 소나타를 구분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두 차가 워낙 흰색이 많으니 그냥 흰색 중형 세단은 다 똑같아 보인다. (공유 자동차의 대부분은 흰색이다. 아무래도 관리가 편해서 그런 것 같다. 그리고 도로에 나가면 흰색 세단이 정말정말 많다!) 그저 세단은 다 비슷한 세단으로 보이고, SUV도 다 비슷한 덩치 좀 있는 차로 보이고, 경차는 또 경차끼리 비슷해서 사실 모닝과 스파크 구분도 어려웠다. 차를 구분하려면 가까이 가서 뒤꽁무니에 쓰인 이름을 봐야만 알 수 있는 사람이 나다. 겨우 구분하는 것은 BMW 미니나 기아 레이, 현대 캐스퍼처럼 외관이 아주 튀어야 대번에 구분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모양이 비슷한데 그 안에서 얼굴 조금씩 다르고 엉덩이 조금씩 다르고 그런 거는 전혀 구분할 수 없다.
그에 비해 면허도 없고 역시 차 한번 가져본 적 없는 룸메는 어쩜 그리 차 이름을 척척 아는지, 신기할 때가 많다. 어쩌다 보면 네다섯 살짜리 남자아이 중에도 차 이름을 기가 막히게 잘 맞히는 경우가 있더라. 너무너무 신기하다. 어쩜 그리 차를 좋아할까? 그렇다고 이걸 성별의 차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차에는 척척박사인 여자 친구들도 많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어려서부터 관심을 어디에 기울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겠지. 나는 우리 동네에 새로 생기는 가게가 어디고 사라지는 가게가 무엇이며, 이 마트에는 공산품이 싸고 저 마트에는 채소가 싸며, 시장에서는 무엇무엇을 사야 하는지, 시장의 아저씨 반찬가게에는 특히 무슨 김치가 맛있다던지 하는 걸 모두 알고 있다. 전부 룸메는 전혀 모르는 정보들이다. 심지어 그는 매일 지나다니는 길에 어떤 가게가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길을 걸을 때 주변을 살피지 않고 오로지 땅만 보며 걷는 모양이다.
그러니 사실 나는 어떤 차를 사든 크게 상관이 없었다. 조금 작아도 되고 조금 커도 된다. 이름이 무엇이든 회사가 어디든 상관없다. 그저 앞에서 꼽은 세 가지 조건만 맞으면 되었다. 거기에 잘 달리고 잘 서면 문제될 게 전혀 없다. 그러니 차종을 고르는 것은 룸메의 의견에 따르는 걸로 했다.
그럼 이제 차 쇼핑을 시작해 볼까? 내 생애 부동산 전세금 말고 이렇게 큰 금액을 써보려는 건 처음이다. 아무리 차를 몰라도 신중해져야 할 때다.
뭐든 인터넷으로 사는 세상이라 중고차 전문 인터넷몰도 성행하고 있는데, 가장 유명한 곳이 엔카와 케이카다. 여기서도 몇 달에 걸쳐 정말 많은 중고차를 찾아봤다. 어떤 이는 사이트에서 보증하는 차는 믿을 수 있다고 하고, 어떤 이는 그것은 최소한이 기준일 뿐 여전히 선택의 책임은 본인에게 있으며 차 전문가를 데리고 직접 가지 않는 이상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워낙 중고차를 속여 파는 경우가 많아 그런 말들도 이해는 갔다. 우리는 일단 여러 기준을 세워 차종을 고르는 데 사이트를 요긴하게 썼다. 여기서는 가격, 옵션, 차의 위치, 연식, 보험이력, 제조사 등등 온갖 기준으로 차를 선별할 수 있다. 정말 다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중고차가 등록돼 있으나, 우리가 절대로 포기하지 못하는 조건들을 넣고 보니 살 수 있는 차는 한줌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원하는 조건이 그만큼 어려운 조건이라는 거다.
1) 예산의 변경
경차를 피하자니 대출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가 가용할 수 있는 돈의 최대치는 600-700만 원이었는데, 그 돈으로 대출 없이 살 수 있는 차는 오래된 경차뿐이었다. 경차가 아니라면 당장 폐차를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아주 오래된 차이거나 상태가 무척 나쁜 차다. 아무리 초보라고 해도, 언젠가 사고가 날 거라고 해도, 운전을 하고 처음으로 그런 차를 타면 너무 위험할 것 같았다. 혹시 나중에 운전의 달인이 되면 그런 싼 차를 사서 고쳐가며 달래가며 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자동차 대출까지 받을 생각을 하고 1천만 원 중반대로 예산을 올려 잡았다.
2) 신차도 고려해 봤지만
국산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현대-기아차는 신차 가격과 중고차 가격이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중고차 가격이 상당히 비싼 편이다. 이는 부품이 저렴하고 수리가 용이해 유지 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굳이 위험 부담을 안고 현대-기아차를 중고로 사느니 그냥 최신 옵션이 들어간 현대-기아의 신차를 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마침 당시에 아반떼가 리뉴얼되면서 깡통버전(아무런 옵션이 없는 기본 사양을 말하는 은어. 옵션이 '비었다'고 깡통이라고 하나 보다.)이 꽤 합리적인 가격에 팔리고 있었다. 1800만 원 정도였다. 깡통이라고 해도 현대-기아차는 기본적인 안전 옵션이 많이 들어가 있어서, 내가 원하는 비상자동제동장치가 이미 갖추어져 있다. 생각한 예산보다 오버되지만, 좀 무리해서 차를 사도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어차피 중고차 가격이 크게 떨어지지 않으니 타다가 정 힘들면 차를 도로 팔 수도 있다. 다만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당시 코로나로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이 큰 부침을 겪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신차 출고가 많이 늦어진다고 했다. 신차를 예약하면 1년 뒤에나 출고된다는 놀라운 소식. 아무리 오래 차를 골라도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그때까지 쏘카만 타라고? 운전 능력이 후퇴할 것만 같다. 그냥 중고차로 가자. 중고차는 이미 시장에 나와 있는 것이니 그냥 가서 사면 되잖아.
3) 중고차 매장 방문
우리는 유튜브로 열심히 영업을 하는, 부천에 있는 한 중고차 매장을 찾아갔다. 몇 달 동안 그 채널을 봤는데(좀 오래 보긴 했지...) 믿음 가는 구석이 있어서 한번 알아나 보자 하고 간 것이다. 보통은 아는 딜러를 찾아간다고들 하는데 - 중고차는 하도 많이 속인다니까 - 우리는 아는 딜러가 없었다. 혹시 다리 건너 알음알음 찾아간다고 해도 내 지인이 아닌 이상 그냥 모르는 사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먼저 전화로 예약을 하고 택시를 타고 찾아갔다.
딜러를 기다리는 동안 유튜브에서 봤던 작은 사무실과 넓은 중고차 매매단지를 보며 조금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딜러는 40대 남성으로 깔끔하고 정중한 인상을 풍겼다. 예약 때 이미 대략의 조건을 말해 두어서, 그에 맞는 차를 몇 대 골라두었다고 했다. 함께 차를 보러 가보았다. 첫 번째 차는 해당 사무실에서 사둔 검은색 소나타였는데, 옵션이 많지는 않으나 비교적 최신인데다 깔끔하게 관리되어 있어 새것 같았다. 잠시 단지 주변을 시승도 해보았는데 차는 아주 편안하고 좋았으나 우리가 타기에 좀 과한 면이 있었다. 내가 연수를 받았던 차도 소나타였는데 그 차보다 훨씬 크게 느껴졌고 어딘가 부담스러운 감이 들었다.
두 번째로 본 것은 트레블레이저다. 셀토스처럼 소형 SUV로 분류되는 차로, 차 자체는 마음에 들었으나 가격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높았다. 디자인이 예뻐서 가격이 높은 줄 알면서도 후보에 넣어두었던 차종이다. 게다가 SUV는 차체가 높으니 운전을 하기에도 편한 면이 있다. 트럭의 경우 높은 운전대에 앉으면 길이 훤하게 보이고 앞의 승용차들이 어떤 상황인지도 잘 보인다. SUV도 비슷하게 시야가 트여 초보가 운전하기에 다소 유리하다. 이런 것도 알고 있다니, 내가 1종 보통 면허를 괜히 딴 게 아니다. 에헴. 하지만 SUV는 사고 싶어도 대부분 세단보다 가격이 한 차원 높았다. 눈물을 머금고 포기.
마지막으로 본 것이 쉐보레의 중형 세단인 말리부다. 크기도 연수받았던 차와 비슷하고 옵션도 꽤 알차게 들어 있었고 잠시 몰아보니 승차감이 다소 딱딱한 것 외에는 마음에 들었다. 중요한 건 가격이었는데, 1600만원으로, 우리가 생각한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내가 가진 돈은 600만 원, 그럼 대출을 1,000만 원 받아야겠군. 대출은 어디서 받아야 하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이 차를 사기로 했다. 예산에도 맞고 차의 컨디션도 괜찮았다.
전 주인이 5년 정도 타다가 팔았고, 그 다음 주인은 중개상이다. 한 명만 타다가 팔린 차가 중고차 시장에서는 인기가 좋다. 관리가 잘 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누적 주행거리는 6만 킬로미터. 그만하면 나쁘지 않았다. 일년에 만 킬로 정도 타는 것은 보통이다. 자동차성능-상태점검기록부와 보험기록을 봐도 큰 사고가 없었다. 본네트 부분의 단순 교체가 있었으나 흔히 '뼈대 먹는다'고 하는, 차의 기본 골격에 손상이 가는 사고는 아니었다. 가벼운 접촉 사고 정도였다는 뜻이다. 당연히 렌트 이력도 없었다.
렌트 이력은 중고차에서 기본 중의 기본으로 봐야 하는 사항이었다. 렌트 사업자용은 보험 자체가 달라 어떤 사고가 나도 일단 팔아버리면 기록이 남지 않고, 렌트카는 한 사람이 타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잠깐씩 타기 때문에 험하게 사용됐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외관이 멀쩡하고 연식이 적어도 렌트카로 운행되었던 차는 안 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차를 사기로 결정했는데... 이런 프리랜서는 제1금융권 대출이 안 된단다?! 야 집 전세금 대출도 안 나와서 고생을 했는데 자동차 대출도 안 된다고? 프리랜서 이렇게 서럽다고...? 1금융권이 안 되면 2금융권으로 가면 된다. 그쪽은 바로 나온다. 하지만 이율이 아주 높다. 그때 마침 희망이 보였다. 신한은행의 마이카 대출 상품은 사업자가 있으면 대출이 된다는 거다. 마침 나는 2017년부터 사업자이긴 한데... 여기서 또 다른 복병. 중간에 면세에서 과세로 바꾸는 통에 사업자번호가 바뀐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사업자를 유지한 지 1년이 넘어야 대출이 가능하단다. 한 달만 더 있으면 1년이 된다. 18년을 기다렸는데 한 달은 당연히 기다릴 수 있지. 딜러에게 상황을 알려주고 계약금을 걸었다. 한 달 뒤 대출이 나오면 차를 받는 것으로. 그렇게 차를 사게 되었다. 내 이름으로 된 나의 첫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