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여행 5일 차.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식산봉이란 작은 오름에 올랐어요. 해안가를 따라 걷기 시작해 나무가 우거진 숲을 10분가량 오르다 보면 금방 꼭대기에 다다르는 소박한 오름이었어요. 용눈이오름, 새별오름처럼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은 아니었지만 바닷길과 숲길을 모두 품은 오름이라기에 마음이 끌렸어요. 게다가 아주 높지도 않아 초보자도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어서 저에게 제격이었고요. 점심을 간단히 먹고 식산봉으로 향했어요.
해는 따듯하게 내리쬐고 바닷바람은 시원했어요. 기분 좋은 해안가 끝에서 숲길이 시작됐어요. 나무가 우거진 숲길은 해안 길과 달리 잘 정비되어 있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위험하거나 오르기 어려운 길도 아니었어요. 하지만 경사는 꽤 높아 금세 숨이 차올랐어요. 숨이 차기 시작하자 금방 어지러워지는 것도 같았고, 그러자 몇 해 전 제주 여행에서 잊을 수 없던 비자림 산책길이 다시 떠올랐어요.
2015년 여름이었어요. 무척 맑은 날이었고 햇볕도 뜨거웠어요. 그런 날 비자림에 갔어요. 날이 좋아 기분도 덩달아 좋았고 들떠 있었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그날 전 참 이상한 경험을 했어요. 오래된 나무들이 우거진 비자림 숲을 걷다가였어요. 기분 좋게 숲속에 들어섰고 커다란 나무들 사이로 촉촉한 흙을 밟으며 걷는데, 문득 답답한 기분이 들기 시작한 거예요. 처음엔 그게 무슨 느낌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점점 걷다 보니 키 큰 나무들이 하늘을 가려버리면서 그 나무들 안에 갇혀버린 듯한 기분이 든 것 같아요. 결국 전 숲길 안쪽으로 더 들어가지 못하고 초입에서 돌아 나왔어요.
그 후로 비자림을 간 일은 없어요. 그렇지만 비단 비자림만이 저에게 문제가 됐던 건 아니에요. 이후 비슷한 숲길에서 같은 경험을 하고 재빨리 나와 버린 일이 또 있었거든요. 그땐 친구와 함께 여행하던 중이었는데, 저 때문에 여행을 망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번 식산봉에서도 그때의 그 어지럼증이 또 시작된 거예요. 벌써 세 번째. 이번엔 좀 버텨보기로 했어요. '견디지 못할 만큼 힘든 건 아니니까 일단 더 걸어보자' 하는 마음으로요. 숲길이 문제가 아니라 숨이 차서 순간적으로 어지러운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속도를 조절하면서 차근차근 걸었어요. 그렇게 경사가 가파른 곳을 내내 걷다가 코너를 도니 양쪽으로 우거진 나무들이 내려다보이는 평지길이 나왔어요.
그때였어요. 갑자기, 갑자기 나무가 무서웠어요. 이상한 말인데 정말 그랬어요. 나보다 키가 다섯 배, 아니 열 배쯤은 더 크고 둘레는 양손으로 감쌀 수 없을 만큼 드넓었어요. 그만큼 오랜 시간 이곳에 머물렀을 나무들의 유장한 세월이 느껴진 거예요. 그 우람한 모습 안에 깊이깊이 새겨진, 긴 기간 동안 축적된 시간의 무게에 짓눌리는 것 같았어요. 거대한 나무들 사이에 전 너무나 작고 왜소한 존재였어요. 지금에서야 돌이켜 보면, 그 짧은 순간에 전 나무가 품은 막강한 힘을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리고 곧 나에겐 그럴 힘이 없다는 걸 알고 무서워진 거예요.
커다란 나무들에 둘러싸인 구간은 금방 끝이 났어요. 곧 정상에 다다랐고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벤치에 앉아 생각했어요. 비자림에서 느낀 그 답답함과 어지러움은 나무가 하늘을 가려서가 아니었어요. 저도 모르게 나무의 존재에 압도된 거예요. 또 저도 모르게 나무에 맞서고 싶어 했고, 동시에 좌절하고 있었어요. 두려웠어요. 이겨낼 자신이 없는 나무의 그 광대한 힘이 자꾸만 떠올라 결국 울고 말았어요.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어느 날, 지도 교수님과 대화를 나누던 중 식산봉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말했어요. 그랬더니 선생님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산에 갔다가 오래된 절 앞에서 600년 된 나무를 봤는데 기분이 이상했다던 기억이었어요. 그 커다란 나무가 너무 멋져 사진을 찍으려던 순간, 아무래도 이건 찍으면 안 될 것 같아 조용히 카메라를 다시 넣었다는 이야기. 그러면서 그건 나쁜 기운도, 맞서 싸워야 하는 기운도 아니라고 다독이셨어요. 당신은 그날 그 나무를 보며 "당신의 세월을 인정해요" 하는 말을 맘속으로 건넸다고 하시면서요. 그저 "얼마나 힘들었어요? 참 잘 견뎌냈네요" 하고 인정해주면 그만이라고.
그 말을 들으니 모든 게 해결되는 기분이었어요. 나의 존재는 나의 존재 자체로, 나무의 세월과 그 존재는 또 그 자체로 인정하면 될 것을. 전 서로 비교할 수 없는 걸 같은 선상에 두고 애써 대결하고 있었어요. 그리고는 애써 그 대결에서 지고, 애써 두려워하고, 끝내 울고 만 거예요. 그 후로도 한동안 나무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어요. 이미 오래 전부터 나무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던 것도, 그걸 이제야 구체적으로 깨닫게 된 것도 신기했어요. 왜인지 모르지만 하염없이 눈물이 났어요. 슬프진 않았지만 한참을 울었어요.
음악학술 매거진 '씨샵레터'에 소개된 글입니다.
https://csharpletter.stibee.com/p/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