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한 독서 문화 텍스트힙과 문화자본주의의 긍정 회로
최근 텍스트힙(Text Hip)이란 현상이 주목받고 있다. 독서 행위가 어딘가 그럴듯해 보이고, 있어 보이고(’있어빌리티’라는 신조어도 있다), 이른바 힙해 보인다고 여겨 ‘독서로서 힙함을 수행’하는 일종의 문화 현상이다. 이것을 문화 현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이미 여러 기사와 칼럼에서 한 목소리로 언급하고 있는 바, 600만 건이 넘는 인스타그램의 ‘북스타그램’ 해시태그 수나 아이돌과 관련된 도서가 하루아침에 여덟 배 이상 판매되었다는 등의 소식은 텍스트힙 현상이 단순한 신조어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텍스트힙은 그것을 추구하는 독자들의 독서 행위가 지식 습득이나 교양 함양 같은, 독서를 향한 ‘진정한’ 혹은 ‘순수한’ 목적이 아니라, 나름의 고상한 취미를 자랑하기 위한 ‘변질된’ 목적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논쟁적이기도 하다.
텍스트힙 현상을 바라보면서, 클래식 음악 문화에도 클래식힙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지 않은가 생각했다. 이것을 텍스트힙만큼이나 문화 현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의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클래식 음악을 듣는 행위 역시 독서 못지않게 ‘그럴듯해 보이고’, ‘있어 보이’는 종목(?)이 아닌가 하는 짐작에서다. 이 글은 텍스트힙의 문제를 클래식 음악 문화에 적용해 생각해 보려는 시도다. 특히 이 현상을 둘러싼 논쟁을 우치다 타츠루의 문화자본 비판에 기대어 고민해 본다. 클래식힙, 혹은 문화자본은 무엇인가? 그것의 속성은 무엇이고 어떠한 형태로 구체화되는가? 그것은 좋은가, 혹은 나쁜가?
‘텍스트힙’의 정의에 기대어 생각할 때, ‘클래식힙’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클래식 음악회에 가기로서 힙함을 수행하는 현상.’ 만약 그렇다면, 클래식 음악회 문화에는 그에 버금가는 용어가 이미 존재한다. ‘콘서트고어’(concertgoer)라는 개념이다. 콘서트고어는 말 그대로 ‘음악회에 가는 사람’이다. 좀 더 정확하게는 ‘자주’ 가는 사람이다. 콘서트고어가 음악회에 ‘자주 가는’ 사람을 일컫기 위한 말이지, 음악을 ‘자주 듣는’ 사람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음악(행위)을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음악 애호가’라고 구별하여 부른다는 점을 고려할 때, 콘서트고어는 분명 텍스트힙에 견줄 만하다.
그렇다면 클래식힙에 관한 이야기는 콘서트고어에서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따르면, 콘서트고어라는 말이 사용된 최초의 예는 1820년에 발견된다. 사전은 더 구체적인 정보도 제공하는데, 그에 따르면 이 단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1828년에 발표된 영국의 음악학자 에드워드 홈스(Edward Holmes)의 음악 비평문에서다. 콘서트고어가 이 시기에 생겨난 말이라는 점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이 시기는 서양음악의 역사에서 예술음악의 대중화가 이루어진 때와 맞물리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19세기 초 유럽에서 나타난 대중문화의 환경에서 콘서트고어는 이른바 ‘진정한’ 청중과 그렇지 않은 무리를 구별 짓기 위한 말로 생겨났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 글이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구별짓기』(새물결, 2005)에서 다룬 ‘문화자본’의 문제로 연결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다.
촌철살인의 일본 철학자 우치다 타츠루의 문화자본 비판1)은 실제로 콘서트고어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해준다. 그는 문화자본을 크게 둘로 구분한다. 신체화된 문화자본과 제도화된 문화자본이다. 전자가 “’가정’에서 얻은 취미, 교양, 예의범절”이라면, 후자는 “’학교’에서 학습하여 얻은 지식, 기능, 감성”을 일컫는다.(21) 우치다에 따르면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습득한 교양과 ‘학교’와 ‘사회’에서 노력으로 학습한 문화자본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특히 문화를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전자는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언제나, 어디서나 문화자본을 누려왔다. 문화자본이 피부 감각으로서 각인된 신체화된 문화자본가의 태도는 여유로움과 편안함이다. 이와 달리 후자에게 문화자본은 언제나 학습과 노력을 통해 얻어낸 것, 그러므로 제도화된 문화자본가의 태도는 “나도 그것을 안다”는 것을 늘어놓기 위한 몸부림이다. 제도화된 문화자본에 대한 다음과 같은 우치다의 언급은 너무 날카로워서 따갑기까지 하다.
‘학력에 의한 문화귀족’이 결코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은 “모른다”는 말이다. “모른다”라는 고백이 그 사람이 ‘원래 속한 계층’을 폭로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_우치다 타츠루, 『거리의 현대사상』, 23.
부르디외의 탁월한 비유를 빌려 말하자면 “혈통에 의한 문화귀족”은 자신이 본 영화에 나온 배우의 극 중 이름을 기억하는 반면, “학교에 의한 문화귀족”은 자신이 본 적 없는 영화의 감독 이름을 기억한다. 전자는 ‘경험’을 소중히 여기고 후자는 ‘지식’을 ‘경험’보다 우선한다. “작품 자체를 소홀히 보더라도 작품에 대해 말하기를 우선하며, 감각을 희생하더라도 훈련을 중시하는” 것, 그것이 ‘학교에 의한 문화귀족’의 ‘본색’이다.”
_우치다 타츠루, 『거리의 현대사상』, 24.
1) 이에 관해서는 우리말로 번역된 우치다 타츠루의 책 『거리의 현대사상: 우리 주위에 만연한 허위 상식 뒤집기』(서커스, 2019) 중 특히 제1장 ‘문화자본주의의 시대’와 제2장 ‘이겼느니 졌느니 떠들지 마라’를 살펴볼 만하다. 이 글에서 문화자본에 관한 논의는 주로 우치다 타츠루의 이 책을 참고해 정리한 것이다. 본문에 적힌 괄호 안 숫자는 위 저서의 쪽 번호다.
문제는 (일본) 사회가 문화자본으로 계층화되고 있다는 점이고,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문화자본으로 계층화된 사회는 경제자본으로 인한 계층 사회보다 계층 간 유동성이 낮다는 데 있다. 경제자본으로 계층화된 사회의 경우 태어날 때부터 가난했을지언정 후천적인 노력으로 계층 이동, 곧 사회적 상승이 가능할 수 있는 반면, 문화자본은 그것을 교환할 수 없다는 속성 때문에 계층 간 이동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문화자본은 보다 제한된 사회집단에 배타적으로 축적되는 성질을 가진다.
_우치다 타츠루, 『거리의 현대사상』, 30.
어려서부터 문화자본을 몸으로 익힌 ‘금수저’ 문화자본가는 문화자본을 소유하려는 욕망에서 자유롭다. 이미 가졌기 때문이다. 문화자본을 추구하는 것은 그것이 결여된 ‘흙수저’ 문화자본가 쪽이다. 흙수저 문화자본가는 끊임없이 교양과 지식을 쌓아 금수저 문화자본가가 되려고 한다. 그러나 노력한다는 것은 이미 자신이 흙수저 문화자본가라는 증거다. “’노력하면 진다’는 것이 이 게임의 규칙이니까. ‘노력하지 않은 채 처음부터 이기고 있는 사람이 <독식>한다’는 것이 문화자분주의 사회의 원리다.”(32)
요컨대 ‘이미 뒤처져 있다’ ‘이미 차이가 벌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만이 문화자본을 욕망한다. 그리고 그런 욕망을 동기로 삼은 ‘벼락 문화귀족’들은 벼락이면 벼락일수록 ‘타고난 문화귀족’에 대해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느낌’을 통감하게 된다. 그것은 문화자본의 획득을 목표로 한 동기 자체의 ‘불순함’이 끝없이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_우치다 타츠루, 『거리의 현대사상』, 31.
우치다 타츠루의 문화자본 비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다시 콘서트고어와 텍스트힙으로 돌아가 보자. 콘서트고어와 텍스트힙이 서로 공유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 둘 모두 두 가지 문화자본의 유형 중 후자, 곧 제도화된 문화자본(흙수저 문화자본가) 쪽에 가깝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둘에는 차이도 있다. 도파민 중독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는 사회의 한편에서 이례적으로 활발한 독서 열풍에 관한 긍정적 인식(’독서 행위는 멋지다’)이 텍스트힙의 기저를 이룬다면, 콘서트고어는 다르다. 콘서트고어는 비자발적인 이름이다. 콘서트고어란 말을 만든 것은 ‘음악회에 자주 가는 사람’(콘서트고어)이 아니다. 콘서트고어가 아닌 누군가가 그들을 호명하기 위해 필요로 한 것이 바로 이 용어의 기원이다. 게다가 그것이 예술음악의 대중화와 함께 나타난 고급문화와 저급문화 간의 관계와 무관하지 않다면, 이 말에는 얼마간 부정적인 함의도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고급문화와 저급문화 간의 구별이, 금수저 문화자본과 흙수저 문화자본과 쌍을 이루는 이루는 아니라, 흙수저 문화자본 ‘안에서’ 구성된다는 점이다. 고급문화와 저급문화가 대중문화의 발전과 함께 생겨난 구분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둘을 구분하려는 것은 귀족 계층이 아니다. 그들에게 대중문화의 향유자 부르주아는 관심 밖의 영역이다.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를 구분하려는 주체는 부르주아 계층 안에서도 자신의 문화자본 결여를 스스로 인식하는 몇몇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문화자본주의의 진짜 주체는 ‘타고난 문화귀족’도 아니고, 문화자본의 결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쪽도 아닌, 이른바 ‘벼락 문화귀족’(부르주아)이다. 벼락 문화귀족은 끊임없이 타고난 문화귀족으로 사회적 계층 상승을 노리는 한편, 부지런하게도 자신의 아래에 위치할 사람을 찾는다. 우치다 타츠루가 이들을 “부지런한 차별주의자”(40)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그는 이들을 귀족과 부르주아 사이에 위치하는 ‘프티 부르주아’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우치다가 강조하는 바, 프티 부르주아의 문화자본에 대한 ‘불순한’ 목적은 나쁜 것이 아니다. 이들이야말로 유동성이 낮은 계층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문화 생성의 장 그 자체”(44)이기 때문이다.
문화가 ‘자본’이 된다는 말을 들으면 눈치 빠른 작자는 “이크, 이제부터는 교양으로 승부해야지”라며 주판알을 튀긴다. “앞으로는 독서량이 출세의 열쇠가 된대”라고 들으면 <세계문학전집> 독파 계획을 세워서 쭉쭉 읽어나간다. 쭉쭉 읽어나가던 도중 그만 사드나 니체나 바타유 등을 읽기 시작하여 정신 차리고 보니 출세 같은 건 아무래도 좋게 되었다.....라는 역설은 문화자본주의만의 운치다.
_우치다 타츠루, 『거리의 현대사상』, 48.
여기까지 생각을 이어오고 보니 ‘텍스트힙에 버금가는 콘서트고어가 클래식 음악 문화에는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식의 초반의 접근은 이 논의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보다는, 그 자체로 문화 생성의 장이 될 ‘콘서트고어’에서 이제는 그 부정적 인식을 걷어내는 일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하게 된다. 지금도 여기저기서 쓰이는 ‘콘서트고어’라는 말이 과연 부정적 함의를 갖는가, 누군가는 반문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콘서트고어가 스스로를 콘서트고어라고 부르는 일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적어도 그것이 긍정적 의미로 작용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방증한다. 문화자본주의의 주체인 프티 부르주아의 ‘노력’이 장기적으로는 문화자본으로 편재한 계층사회에 유동성을 가져올 수 있겠다는 우치다(와 부르디외)의 긍정 회로를 믿어본다면, 콘서트고어라는 말을 이제는 ‘클래식 음악 문화의 멋짐을 자발적으로 수행’하는 “클래식힙”으로 바꿔 불러봐도 좋지 않을까.
[참고문헌]
• 우치다 타츠루, 『거리의 현대사상: 우리 주위에 만연한 허위 상식 뒤집기』 서커스, 2019.
• 존 스토리, 『대중문화란 무엇인가』 태학사, 2011.
• 출판N, “텍스트힙(Text-Hip)에 빠진 Z세대 - 지루한 텍스트? Z세대를 사로잡다” 2024.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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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ior Editor_박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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