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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추도사 Sep 07. 2023

솔직함이란 버려진 무기

배추가 윤슬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

아름다운 윤슬에게


언니는 왜 이렇게 여자 복이 많은 걸까. 얼마 전에 브런치에 연애 자기소개서를 올렸어. 다들 진행상황을 궁금해하는데, 처참해. 망했어. 남자는 한 명도 못 건졌고, 그저 '언니, 존멋이에요'라며 자매 응원단만 늘었어. 그 글, 너에게 하소연하다가 쓰게 된 거잖아. 아침부터 잔디밭에 널 불러내서 복싱을 한바탕 하고, 우린 사랑이 뭔지, 연애가 뭔지, 남자 놈들 어떻게 꼬셔야 하는지 라는 이야기를 하다가 집에 와서 즉흥적으로 쓴 글인데. 연애 재기(再起)를 위해 발버둥을 친 글이 더 친하게 지내자고 고백하는 여자 친구들을 만들어낼 줄이야.


그 연애 자소서는 결과를 떠나서, 글 자체만 봐도 실패한 글이야. 처음엔 조회수가 폭발해 흥행을 점쳤어. 드디어 주체적으로 이성을 구하겠구나 싶었지. 근데 시간이 흘러도 아무것도 없어서 글을 다시 읽어봤어. 나의 사랑가치관도, 남자를 보는 조건도 너무 부끄럽더라. 그 글 삭제 해버리고 싶어. 윤슬은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언니는 연애를 쉬면서 사랑이 뭔지 홀랑 까먹었나 봐.


언닌 사랑을 딱 한번 했어. 사랑은 빠져버리는 거잖아.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서핑보드 위에서 패들링을 해서 어떻게든 바다에서 나가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기운이 다 빠져서 정신 차리고 보니 백사장은 더 멀어져 있고, 바다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남겨져버려 어쩔 도리가 없는 감정의 상태. 근데 자기소개서를 보니깐 사랑(연애)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무슨 권투시합 하러 출전한 선수인 줄. 이제 난 링 위에 올라섰고, 댓글로 든든한 응원도 많이 받고 있으니, 이제 체급 되는 놈만 올라와라는 식의 오만한 도전장 같았어. 사랑(연애)의 시작 방법이 틀렸으니, 뭐가 될 리가 없지.


탈모남의 뭐가 좋았냐면, 30대 후반 돈과 커리어가 좋은 남자의 여유가 좋았어.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탄탄한 스펙과 연봉에 내가 두 발 뻗고 누울 수 있겠다 싶더라. 나이만큼 쌓인 노련함도 매력적이었어. 어떤 고민을 괴발개발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고 분석, 판단해주는 게 편했어. 언니는 커리어, 관계, 돈관리 뭐 다 길을 잃은거 같아 혼자서 울었다, 좋았다, 짜증 났다, 어쩌지 싶은 날이 대부분이야. 근데 오랜만에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서 간파당하는 것도 속이 뻥 뚫리니 편하고, 그런 사람을 보면서 자극받아 커리어를 고민하고 이력서를 쓰기 시작한 변화가 좋았어. 무엇보다 내 꿈이 돈에서 한껏 자유로운 척하면서 순수하고 낭만적인 글을 쓰는 거거든. 고고하고 품격 있어 보이잖아. 그 남자 만나면 지금 엄마아빠랑 살면서 여유롭게 글쓰는 생활을 지속할 수 있을 거 같아서 맘에 들었나 봐. 그래 나 이런 인간이야.


지금은 좀 웃긴 신세가 돼 버렸지만, 이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주체적이고 떳떳하게 살려고 노력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왜 연애를 안 하냐는 질문에 '저는 제가 제일 재밌어서요'라고 말했어. 원하는 것을 찾고, 그걸 얻기 위해 여러 도전하면서 원하는 일, 연봉, 관계, 환경에서 생활하는 인생. 그런 내가 좋았거든. 그런데 한순간에 자진해서 돈 많은 탈모남에게 매료되고 그 명예와 부에 편승하려한게 알쏭달쏭해. 자기의 명예와 부는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걸 잘 알면서도 여전히 그 남자랑 연애했으면 어땠을까 망상하는 내가 별로야.


사실 그 글을 올릴 때도 지울까 말까 고민했고, 지금도 가장 맘에 안 드는 문장은 조건에 '부와 명예가 있는 직업'이야. 언니는 얼마 전까지 연봉 2500만 원 정도의 커피일을 했어. 커피일은 정말 힘들었지만 보람찼고, 숭고한 일이었어. 누군가가 '카페 아르바이트하는구나'라고 말하면 속으로 그 사람을 욕했어. 적어도 우리 카페는 모두가 커피와 서비스에 진지하고 철학을 가진 일꾼이었거든. 그리고 그 돈으로 가정과 삶을 유지해. 많은 사람들이 하찮게 보는 일이지만 성실하게 제 몫을 해내는 사람들과 일하면서 7년 차 책상물림 직장인은 큰 배움을 얻었어. 나는 첫 사회생활이 진보매체의 정치/사회부 기자였어. 낮은 곳으로 가서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겠다며 현장에 가서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고 공감하며 취재했어. 근데 기사 쓰려고 머리로만 공감한 척했나 봐. 직업에는 귀천이 없으며, 어떤 직업이든 존중받아야 한다는 걸 커피 카운터에서 진상 손님을 대하고, 컵을 500개씩 설겆이하고, 분리수거를 2시간씩 하면서 몸으로 배웠어. 연애 자소서의 조건을 읽은 성실한 일꾼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직업의 부와 명예를 가늠해보고 부끄러웠을까. 난 내가 부끄러워.


얼마 전 김영민 교수의 '공부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었어. 그 책에서 수십 번 읽다가 정말 좋아서 필사도 여러 번 한 문장이 있어.


모순이나 긴장 없는 삶이 가능할까? 그럴 리가. 삶 속에는 서로 잘 화해되지 않는 에너지가 공존하곤 한다. 자신은 이미 결혼 한 몸이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이 결혼이라도 할라치면 배신감을 느끼는 팬. 자신의 잘못을 통감한다면서도 형량을 줄여달라는 범죄자. 완벽한 직선이란 실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듯이, 완벽하게 일관되고 통합된 삶이란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마련. 모순 혹은 긴장으로 가득한 자신의 존재를 그럭저럭 거두어 살아나가는 것이야 말로 성인의 일이며, 자신의 모순이나 긴장을 빙하여 남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 시민의 덕성이다.
< 김영민 '공부란 무엇인가'>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잘살고 있다고 떠벌떠벌 거렸지만 막상 돈 잘 버는 남자에게 기생하고 싶은 나. 어떤 일이든 귀하고 존중해야 한다면서 속으론 부와 명예를 따지면서 차별하는 여자. 연애 자소서를 올리고, 비겁한 내가 싫을 때, 이 문장이 큰 위로가 됐어. 난 거대한 모순 덩어리야. 그래서 연애가 두려워. 일상생활, SNS에도 고고한 척 현명한 척 그럴싸하게 포장했지만 사실 찌질하거든. 그래서 온갖 환상을 가지고 오는 남자들에게 멀리 도망치고 싶었어. 연애하면 환상을 깨부수고 별로인 나만 남을 거 같거든. 근데 나쁜 년은 아니야. 좀 웃기고 좋아하는 사람에겐 애교도 많은데. 여하튼 모순적인 나를 꽁꽁 숨겨두고 싶었나 봐.


그래도 연애 자소서를 쓰길 잘했어. 정확히 한 가지는 알게 됐거든. 솔직함이야 말로 이 시대에 버려진 무기라는 걸. 이 글의 조회수가 이틀 만에 1천5백이 넘었어. 공감한다는 메시지와 댓글도 정말 많이 받았어. 나만 탈모남한테 차인 줄 알았는데, 다들 비슷한 경험이 있나 봐. 공감과 응원을 받아보니깐 더 솔직해지고 싶어졌어. 그리고 무엇보다 솔직한 글이 제일 재밌잖아. 때마침 윤슬이 옆에 있더라. 언니가 생각보다 속물에다가 찌질하고 야비하거든? 그래도 너랑의 편지에서만큼은 솔직해지겠다고 약속할게. 이 글은 공개글이지만 쓸 때만큼은 우리 둘만의 비밀 편지라고 생각하고 솔직할래. 그러니깐 도망가지 말고 답장 줘.


모기의 입이 쌩쌩한 처서의 끝에서 배추가 윤슬에게


추신 1) 이번주 토요일 등산 가는 거, 사람들 모았는데 여자만 7명이다. 언니 여자복 많지(뿌듯). 예쁘게 꾸미지 말고 제시간에 와ㅋㅋ 언니가 단호박 샌드위치 만들어갈게 뇸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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