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슬이 배추에게 보내는 첫번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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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촘한 배추에게
제 이름 앞에 ‘아름다운’이란 아름다운 수식어가 붙다니! 부끄럽고 좋아라. 촘촘한 배추, 나중에 여유 되면 배추가 왜 배추인지 글로 설명해줘요. 당장은 아니어도 돼요. 말로 일화를 들었는데, 배추가 눈 반짝이며 말하던 그 순간이 좋았거든요. ‘난 배추가 될래!’ 하는 순간의 배추도 상상이 잘 됐어요. 마치 영화에서 주인공이 핵심 행동을 하는 변곡점이 아니었을까,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해봅니다.
촘촘한 배추의 솔직한 편지 잘 읽었어요. 먼저 시작을 열어주어 고마워요. 언니의 솔직한 편지로, 솔직함은 이미 버려진 무기가 아니라 강력한 무기가 됐다는 거 아시죠. 이 교환 편지를 쓰면서 목표가 생겼어요. 남들이 헉- 할 정도로 솔직해지기. 전 많이 숨는 사람이거든요. 추상을 좋아해서 그런가 봐요.
인스타그램 피드만 봐도 그래요. 처음에 배추를 팔로우했을 때, 깜짝 놀랐어요. 자기 PR이 중요한 이 시대에 이렇게나 스스로를 멋들어지게 잘 드러내는 사람이라니! 부러웠어요. 심지어 팔로워도 네 자릿수야. 팔로잉 수가 세 자릿수인데, 팔로워 수가 네 자릿수일 때 나오는 어떤 경이로움. 저만의 경탄일까요? 물론 숫자가 다는 아니지만, 꽤 근사하잖아요. 언니는 SNS에 고고한 척을 했다지만, 자기 포장도 능력이에요. SNS란 포장지를 뜯어도 배추의 속은 분명 촘촘하고 단단할 거고요. 전 계정이 비공개인데다가, 아는 사람이 아니면 팔로우 요청을 받지 않고, 쉽게 팔로잉을 걸지도 않아요. 하물며 제 얼굴이 드러난 사진은 게시글 맨 끄트머리에 숨겨 놓거든요. 사진 몇 장 넘길 정성을 가진 자, 내 면상 볼 권리를 획득하리라! 이상 당당하지 못하여 숨는 게 일상인 저의 쓸데없는 철학이었습니다. 배추가 첫 편지에 사진을 올려두었기에, 저도 용기내어 사진을 올려봅니다. 솔직해지기로 했으니까요.
사랑이 뭔지 물었죠. “(부메랑을 던지며) 사랑은… 돌아오는 ㄱ…ㅓ… (하략)” 아, 안 되겠어요. 전 언니에게 탈모남이 되돌아오길 바라지 않아요. 어차피 그건 사랑이라 부를 수도 없겠지만. 넝~담~
그러게요, 사랑이 뭘까요? 어느 날엔 저도 모르게 사랑이 무얼까, 궁금해서 도서관에서 알랭 드 보통의 사랑 시리즈를 펼쳐보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어요.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겹친다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 같아서, 좌절하고, 힘들어하고, 마음이 어긋나는 순간엔 마냥 고통스러워했어요. 그런데 이게 이상하게 재밌더라고요. 쉽게 이어지는 사랑 말고, 쉽게 이어지지 않는 사랑이.
저도 사랑이라 부를 만한 사랑은 딱 한 번 해봤어요. 그 외의 만남들은 사랑이란 이름을 붙이고 싶지 않네요. 저와 사랑다운 사랑을 했던 그 친구는 키가 정말 컸고, 섹시했고, 다정했고, 섬세했고, 똑똑했고, 심도 있는 생각이 가능한 사람이었어요. 저와 그는 모든 게 달랐어요, 인종부터 성향까지. 하지만 딱 하나 같은 게 있었어요. 낭만. 낭만을 품은 그의 눈은 제가 여태 본 별들 중 가장 맑고 밝았어요. 어느 밤엔 모로 누워 대화를 하다가 “네 눈은 우주를 담은 것 같아.”라고 말했어요. 감동 받았는지 눈가가 촉촉해졌었는데, 동공에서 윤슬이 보였어요. (제가 그래서 윤슬인 건 아니고요. 저도 제가 왜 윤슬인지 설명해야 할까요? 음, 그건 다음에 할게요.)
제가 그를 기억할 때 어떤 장면들을 자주 떠올리는 걸 보면, 사랑은 순간의 잔상인가 봐요. 어떤 잔상들은 마음속에 세포마냥 콕 박혀 있어요. 누군가와 함께 했던 찬란한 순간들이 그냥 나의 일부가 돼요. 전 그와의 추억을 가끔 기억해내서, 아름답게 키워나가요. 사랑은 지나갔지만, 추억은 세월과 함께 자라서 그저 스쳐지나간 것이 아니게 돼요. 제 마음 한편에 아름답게 머물러 있어서, 언제든 마음의 서랍 속에서 꺼내볼 수 있어서, 그래서… 슥슥 지울 수가 없나 봐요.
어스름한 저녁 아래서 본 밤하늘이 생각나네요. 한 번은 공원을 돌다가 그가 절 목마 태워준 적이 있어요. 그 친구 키가 192cm였는데, 제가 161cm이니 3m를 훌쩍 넘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본 거예요. 어디서 그런 경험을 하겠어요? 저를 이고 공원 한 바퀴를 걸어주던 그였는데… 말하다보니 그립네요. 그가 아니라, 다시 온다 해도 더는 같을 수 없을 유일한 그 순간이. 어쩌면 그의 어깨에 다시 올라탈 수 없기에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다시 오지 않을 스물여섯일 테니까. 그와 나만이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여름일 테니까. 전 낭만을 그리워하고 있네요. 이 낭만적인 추억을 기억으로 치환하는 데까지 5년이 걸렸어요. 그와의 사랑을 건강히 떠나보냈고, 기억만 예쁘게 잘 남겼단 의미예요. 배추, 저에게 이렇게 강렬한 잔상이 있는데,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이 얘길 전하고 나니 사랑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하고 싶어요. 저에게 사랑은 낭만이에요. 그래서 결혼이 하기가 싫어요. 결혼은 현실이고, 생존의 문제와 결합하면 낭만이 살아남기 힘들잖아요. 지난 번 배추가 아들 둘 낳고 싶다 말했을 때 많이 놀랐어요. 이 시대에 아이 낳고 싶단 사람이 존재한다니! 한편으론 멋있었어요. 궁금함을 향해 돌파하려는 모습이 보였거든요. 어른 같았달까. 난 그냥 결혼따위 안 할 거라며 도피하고 있는데… 봐요, 전 또 사랑이라는 이름 뒤로 숨고 있어요.
근데, 외모를 어떻게 안 봐요? 전 외모, 키 많이 봐요. 아마 그것만 보는지도 몰라요. 그렇다고 차은우처럼 존잘을 바라는 건 아니고, 제 눈에 잘생긴 사람이면 돼요. 그냥 적당히. 적당한 건 참 어려워요. 그래서 제가 5년 동안 사랑과 낭만이 만든 허공 사이를 헤맸나 봅니다. 그나저나 사랑하면 눈도 마주치고, 손도 잡고, 꼬옥 안아주고, 다 할 건데 적어도 내 눈엔 차야 하지 않겠어요? 뭣보다 육체관계가 얼마나 짜릿한데. 네, 섹스 말하는 거 맞아요. 왜, 섹스가, 뭐 어때서요. 저도 섹스로 태어난 사람인데! Sex! sex! sex on the… 아, 지나치게 솔직했네요. 이만 줄일게요.
추신1)
저 등산화 샀어요. 우리의 첫 번째 등산 때 등산화 하나 있음 좋다 하여… 저 언니 말 잘 듣죠? 배추랑 등산하면 5kg는 그냥 빠진다기에 언니 말, 좀 더 잘 들어보려고요.
추신2)
5kg 더 빼고 나면, 더 달콤한 제안으로 저를 꼬셔주세요. 그 제안을 와앙- 베어물겠단 각오로 성실히 따를게요. 이미 저번에 언니가 손수 맹글어온 단호박 샌드위치에 홀랑 넘어갔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