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가 윤슬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
낭만 아가씨 윤슬에게,
윤슬아, 언니도 섹스가 너무 하고 싶어. 간절해. 연인이 맨몸으로 호흡과 움직임으로 에너지를 만들고, 서로의 마음을 활짝 열어젖히고 느끼는 게 참 아름다워. 그 순간만큼은 계산 따위는 집어치우고 서로에게 몰입하는 물리적인 행위여서 그런가 난 자고 나면 연인이 더 좋아졌어. 근데 말이다. 너 지금 벌써 웃는 거 다 들려. 얼마 전에 너에게 '근데 오르가즘이 어떤 느낌이야?'라고 물어봤다가, 얼굴에 탄식과 안타까움이 가득한 거 다 봤어.
언닌 섹스는 좋은데 오르가즘이 뭔지는 몰라. 그래도 확신할 수 있어. 전 연인들은 날 정말 많이 예뻐하고 아끼고, 심지어 사랑했다는 걸. 오히려 섹스는 언제나 서툴고 알쏭달쏭한 게 당연하지 않나? 사람의 몸과 감정은 미지의 영역이고, 변하니깐 계속 발견하고 탐색해야 하는 것이잖아. 그래서 섹스란 테크닉과 신체 스펙으로 판가름 나는 영역이 아니라, 서로에게 정성과 노력을 들이는 성실함의 영역이라 생각해. 그래서 섹스가 재밌고 좋은가 봐. 그리고 다 큰 어른이 서툰 게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워. 난 어른이 돼서 편하고 믿을 만한 사람 앞에서만 서툴렀고 그들 앞에서 새로운 걸 시도하고 실수하면서 더 나은 사람이 됐어. 날 평가하는 사람 앞에서는 책잡히지 않으려고 작은 시도조차 안 하려고 회피하거나 말로만 좀 하는 척했는데, 그들과는 인연이 짧더라.
그래서 오르가즘은 내 알 바 아냐. 남들이 정해둔 극락 보단, 나의 부족하고 서투른 연인과 호흡과 감촉을 느끼면서 실수도 하고, 헛발질도 마음껏 할 수 있는 진흙탕이 더 좋아. 남들이 말하는 엄청난 쾌락을 쫓기보단, 오르가즘을 담보하는 남자의 신체적 조건이나 크기 등의 스펙으로 몸을 평가하기보단, 나에게 나타난 연인의 사소한 구석구석도 경외롭게 바라보면서 사랑해주고 싶어. 그게 나의 오르가즘이야. 윤슬이 말한 데로, 사랑이 재밌는 이유가 어긋나는 모양의 마음이라도 잘 포개 놓고 싶기 때문이라 했는데, 어쩌면 인간이 사랑 그리고 섹스를 재밌어하고, 하고 싶어 하는 이유 아닐까. 해도 해도 모르겠고, 알 거 같은데도 또 새롭고, 이게 맞나 싶어서 상대에게 계속 묻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마음과 비언어적인 것에 귀 기울이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계속 공부하고 탐구하는 것.
그래서 요즘 자만추(자고 나서 만나는 것을 추구), 선섹후사(섹스먼저하고 사귀는 것) 트렌드에 기겁을 했어. 난 자면 무조건 사귀어야 해. 아니 사귀어야지 잘수 있어. 만약 상대가 자고 난 다음, 메롱하면서 사라진다면 제정신을 잃을 거야. 난 모든 일에 항상 서툴렀고, 어떤 것을 능숙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인간이야. 뭔가를 단번에 잘 한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자고 휙 떠나버리면 서툰 모습이 비웃음 거리가 된 기분이 들 거 같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기존에 내 공식을 모두 리셋해 버리고 용기 내서 안 해보던 일을 하는 거니깐 나도 자만추를 하게 될 수도(히익!). 왜냐면 이런 야한 글을 쓰는 건 상상도 못 했거든. 근데 윤슬을 만났기 때문에 용감해져서 섹스를 주제로 글쓰고 있어. 누굴 만나는지에 따라 인생은 이렇게나 비논리적이고 충동적으로 흘러가고, 그게 인생에 재미인 거 같아.
근데 글 쓰는 인간에게 연애(사랑)는 확실히 독인 거 같아. 연애할 땐 딱 한 명의 독자인 남자친구만을 위해 글 쓰느라 공적인 글을 아예 안 썼어. 남자친구에 대해서 하루종일 궁금해하고 그를 위한 편지, 카톡에 간절한 마음을 담아내느라 에너지를 다 털어 써서 그랬던 거 같아. 하루가 연인과 나 중심으로 돌아갔기에 그외에 것들은 별로 궁금하지 않아, 글감도 없었어. 모순과 긴장은 글을 쓰게 만드는 강력한 자양분인데, 연애할 땐 기분이 대체적으로 좋고 일이 꼬여도 남자친구한테 쏟아내고 나면 세상만사가 다 괜찮아져서 뭘 써야겠다 생각도 안 했어. 브런치는 연애를 쉬고 나서야 시작하게 된 거고, 공적인 글은 마음속 깊은 생각을 들어줄 사람이 없다 보니 표출되지 못한 감정들이 마음에 쌓이고 쌓여서 '쓰지 않으면 미칠 거 같아'아서 살려고 썼어.
4년 동안 여자친구로서의 역할은 쉬고, 글쟁이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가지면서 '잘 쓴 글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안고 살았어. 너와 비밀 편지를 쓰다가 문득 이전 남자친구들이 써준 긴 카톡글과 편지를 꺼내 읽어봤는데, 정말 잘 썼더라. 그땐 남자친구가 써준 글이니깐 그저 감동하면서 읽었어. 근데 감정들이 다 사라지고 다시 그 글들을 읽어봐도 정말 아름다운 글들이야(심지어 맞춤법이 틀린 데다가 글씨는 꼬불거려). 전 남자 친구들 죄다 인문학이나 감성과 거리가 먼 인간들이었는데 어떻게 글을 잘 쓸수 있었을까. 그때 남자친구들도 내가 써준 편지를 읽으며 '배추 정말 글 잘 쓴다', '꼭 글 계속 써'라고 했었는데 그땐 그 말을 믿지 않았어. 항상 논술 시험에서 떨어지거나, 글 못써서 회사에서 꾸중을 들었거든. 근데 한참이 지나 그 말을 믿게 됐어. 그래서 정확하게 말할 수 있어. 진심과 솔직함이 담긴 모든 글은 잘 쓴 거라고. 어떤 테크닉이나 규칙 따윈 개나 줘야 한다고. 참 섹스랑 겹치네.
그래서 연애의 시작이 어려운 걸 지도 모르겠어. 난 정말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고 그게 삶의 이유이거든. 그래서 서로가 진심일 수 있는 인연을 만나고 싶은데, 그래서 매 순간 진심으로 살면서 글을 쓰고 싶은데 그게 참 어렵다. 근데 이 글 쓰다 보니 알겠어. 진심인 사람은 나타나지 않을거란걸. 대신 서투른 내가, 부족한 남자와 함께 진심을 만들어야 한다는걸. 정말 별 볼 일 없던 연애편지마저도 지갑 속에 꼭 넣어 다니면서 읽고 또 읽으면서 좋다고 말해준 그 말들이 쌓여, 지금의 글쟁이인 나를 만들어낸 것처럼.
정말 오랜만에 발라드 음악을 듣는 백로(白露)의 아침, 배추가 윤슬에게
추신1) 정치뉴스는 성비리가 끓임 없이 나오고, 유명 화장품 나스(NARS)의 대표 제품이 오르가즘인 이 시대에 난 왜 이런 평범한 본능을 드러낸 글에도 걱정이 되고 조마조마한지 모르겠다. 근데 이번글 넘 어려웠어. 너무 오래된 일인데다가, 전문영역이 아니라 정말 너무 힘들었어. 후우-
추신2) 답편지는 꼭 이번주 목요일 이후에 보내주겠니..저번 편지 답장받은 날부터 오늘까지 5일째 일상생활이 불가능 하구나. 너에게 편지 쓰는거 말고는 다 재미없어. 흑흑 지금 돈되는 글 써야 하는데, 편지쓰고 있어. 일요일날 하프마라톤 뛰는 동안 편지에 쓸 내용 전개 짜고, 문장 표현 생각해냈어ㅋㅋ 이력서는 겨우 하나 썼다.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