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추도사 Jan 22. 2024

아버지는 레깅스가 싫다고 하셨어

91년생 캥거루족 딸, 62년생 호랑이 띠 아빠가 같이 커가는 날



아빠는 지금까지 나에게 딱 한번 화를 냈는데 그게 5년 전, 레깅스 때문이었다. 거리에서 레깅스 패션을 보고 기괴하지만 남일이라 치부했는데, 어느 날 딸이 쫄쫄이만 입고 대한민국 이산 저산을 누비고 다니는 것을 알게 되자 정신을 놓아버렸다. 아빠는 품위 있게 대화로 설득하려고 했지만 어림없었다. 남자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 얼마나 천박해 보이는지 설명했지만 지지 않았다. ‘남의 시선에 입고 싶은 옷 못 입는 게 더 한심하다’, ‘여성이 입는 옷에 왈가왈부를 하며, 성적으로 보는 것 자체가 더 별로다’라고 따박따박 반박했을 때, 아빠는 폭발하고 말았다. 다음날 먼저 사과 했지만 난 한 달 동안 아빠를 소 닭 보듯 했다. 그 이후로도 몰래 레깅스를 입었고, 부모님은 애써 모른 체 했다.


그런데 그 딸이 34살에 긴 커리어 방황 끝에 입사하겠다는 데가 레깅스 회사 '룰루레몬'이라니.


"아빠, 나 룰루레몬에서 일하기로 했어 “
"아! 우리 딸이 맨날 입는 그 레깅스 회사! 아빠도 룰루레몬 좋아해. 정말 잘됐네! 여성들의 운동 패션을 '레깅스'로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회사잖아"


놀랐다. 난 싫어하는 것엔 편견을 갖고 무관심으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아빠에게 레깅스는 그런 존재였을 거다. 그런데 어떻게 룰루레몬이 '레깅스'로 여성의 운동패션을 혁신한 걸 알았을까.


"나 근데 매장에서 손님들에게 옷 파는 일 할 거야"

"정말 잘됐네, 우리 딸은 아마 레깅스 정말 잘 팔 거야. 왜냐면 몸매도 좋고 다리도 길잖아. 사람들이 네가 입은 거 보면 사갈 거야. 이왕 파는 거 몸매관리 더 열심히 해서 많이 팔아!"


아빠는 이 말을 하려고 얼마나 오랜 시간, 힘겨운 노력을 했을까. 3년 전, 자신이 극혐 하는 쫄쫄이 바지 때문에 딸과 싸웠지만, 그래도 이해하려고 룰루레몬을 검색하고, 브랜드 스토리 유튜브 영상을 봤을 거다. 여전히 아빠는 레깅스가 불편할지도 모른다. 그치만 딸이 좋아하니깐 머리와 입으로 어떻게든 마음을 바꿔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거겠지.


룰루레몬에서 회사생활은 즐겁고 배움도 많지만, 그와 별개로 아빠가 회사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허겁지겁 화제를 전환하거나 대화를 막아 버렸다. 아무리 자식인생은 자식이 알아서 한다고 하지만, 어렸을 적부터 교육과 경험에 무지막지한 시간과 돈을 쓴 결과가 34살 매장 말단 판매직원이라는것에 딸로서 미안했기 때문이다. 근데 주말 저녁에 아빠가 먼저 운을 띄었다.

 

"사실은 조금 걱정 돼. 갓 대학을 졸업한 시기도 아닌, 커리어도 쌓이고 결혼을 해야 할 시기에 그 일을 하는 게 어떤 이유에서 일까 이해하려고 했는데 아빤 쉽지 않아. 그건 딸의 선택이 잘못돼서가 아니라 아빠가 옛날사람이기 때문이 그런 거야. 그래도 아빠에게 조금 설명해 줄 수 있겠니 “


나도 확신을 갖고 선택한 일에 매일 자주 흔들리고, 홧김에 일을 폄하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날 아빠와 대화한 시간만큼은 진심으로 내가 왜 세일즈를 하고 싶은지, 왜 당장 높은 연봉에 책상에 앉아서 일할 수 없는지, 이곳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딸이 확신이 있으니 다행이다. 앞으로도 아빠가 조언을 하고 잔소리를 하더라도 너는 아빠말을 듣지 않고 싸워야 한단다. 아빤 옛날사람이니깐 너의 세대에게 잘못된 방향으로 조언을 줄 테니깐. 그러니깐 오늘처럼 아빠에게 저항하고 너의 다짐을 믿으면서 나아가야 해. 네가 아빠말을 듣지 않는데서 아빠는 안도감을 느껴"

5년 전 우리가 레깅스로 다투지 않고, 내가 아빠 말을 들었다면 우린 지금 어땠을까. 나는 몇번의 연애를 했지만 상대를 사랑한 적은 없는 거 같아 나의 사랑의 모양이 궁금하다. 그런데도 동네방네 '내 꿈은 사랑을 듬뿍 주는 아들 둘 엄마'라고 확언하고 다니는 데는 아빠의 덕이 크다. 환갑이 넘은 아빠는 여전히 철없는 고집쟁이 딸 때문에 새로운 걸 배우고, 익숙한걸 다르게 보게 되는 것이 삶의 재미라고 말했다. 아 사랑이란 게 이런 거구나.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아빠는 불안할 때 더 성당에 자주 간다. 내가 이 일을 하면서 아빠는 명동성당의 성모상 앞에 자주 가 기도를 한다. 지난주에 명동에 룰루레몬 스토어가 첫 영업을 시작했다.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아빠는 우연히 매장을 발견하곤 창너머 직원들이 일하는 것을 한참 구경하고 집에 와 여러 질문을 했다. "직원들이 허리춤에 빨간 가방을 메고 있던데 그 안엔 뭐가 들어있는 거야?", "우리 딸도 그거 매고 해?", "레깅스 안입고 일하는 직원도 있더라?!"


깔깔거리면서 아빠의 질문에 답변도 해주다가 "아빠, 들어가서 직원들에게 물어보지 그랬어, 우린 손님이 말 걸어주는 거 되게 좋아해. 아빠가 말 걸기도 전에 질문을 이것저것 건내고 따라다니겠지만. 그게 우리 매뉴얼이거든"


"그런 거 같더라, 사지도 않을 건데 일하는 청년들 귀찮게 하기 싫어. 근데 참 직원들이 경쾌하고 보기 좋더라, 역시 젊은 사람들이 몸을 움직이면서 일할때 오는 에너지 있어. 우리 딸 생각이 많이 났어. 마침 성모님에게도 우리딸을 좋은 곳으로 인도해달라고 기도드렸어"


이 대화하면서도 뭉큰한 감정이 솟았다. 아빠는 평소에도 직원이 다가오는 게 부담스럽다며 인터넷쇼핑을 한다. 그래서 육십 넘는 인생 내내 매장 판매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었을 거다. 하지만 내가 이 일을 한다고 하니 애정을 갖고 그 일을 바라 본다. 매장일은 하루종일 서있어야 하는 일이라 너무 힘들다. 관찰하면 단번에 알 수 있다. 연봉도 검색하면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아빠는 '너무 힘들겠다', '최저 시급보단 더 받니?'라는 걱정은 삼키고 보들보들한 눈으로 그 일의 장점을 살피며 응원을 건넸다.


아빠가 4년 전과 달라진 것처럼, 나도 이 일을 시작하고 아빠에게만큼은 달라졌다. 일하면서 배운 것들을 자주 세밀하게 이야기한다. 좋은 일, 나쁜 일, 미주알고주알 이야기 한다. 매장에 온 사모님들의 공통점과 특이점, 손님들에게 어떤 말이나 질문을 하는지, 내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손님 유형, 좋아하는 동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 동료가 어떻게 물건을 판매하고 단골 관리하는지도 이야기한다. 한평생 전문 의학 지식으로 생계를 이어온 아빠에게 고객 상담과 세일즈의 이야기는 새롭고 즐겁길 바란다.


이쯤 되면 나의 꿈은 마치 사업가인 거 같지만 아니다. 내 꿈은 10년 동안 그리고 앞으로도 '아들 둘 엄마'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나는 어떻게 아들을 키워낼까. '사랑'이란 말을 빌미로 구속하고 '엄마'라는 이름으로 걱정과 잔소리를 할까 걱정이다. 그래서 이 글은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다. 남편이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길거리에서 호떡을 팔겠다고 선언하는 날, 아들이 잘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헤비메탈을 하겠다면서 온 집에 화려한 음악을 틀어놓고 예술세계에 빠져 내 혼을 빼놓는 날. 이 글을 꺼내볼 거다. 나같은 딸년은 적용 안된다.


작가의 이전글 나를 부르는 '가벼운 말'이 나를 키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