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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진기자 이희훈 Dec 06. 2019

버림받고 택배처럼 시설에 배달

탈시설 장애인 마로니에 8인 / 고 황정용

'마로니에 8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10년 전 같은 이유로 뭉친 이 8명은 입을 모아 자유를 말했다.  

이들은 자유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살아왔던 시간은 인간의 존엄을 무시 당한 채 숨이 붙어 있어 마지 못해 사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8명은 탈시설 투쟁을 시작했다. 스스로 자기 결정권을 누리며 사회 구성원이 되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시설을 떠난 뒤 서울시를 상대로 이어진 62일간의 노숙 투쟁. 휠체어에 앉아 오랜 시간을 견디고, 불편한 잠자리와 소음·더위를 이겨 내야 하는 힘든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장애인 시설에서 무시당하고 고통 받았던 시간보다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첫 경험이 소중하고 행복했다고 했다. 

사회의 일원으로 산 지 이제 만 10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렇게 독립한 이들이 말하는 자유는 무엇일까?




택배처럼 시설에 배달... 시설비리와 싸우다 탈시설하다


고 황정용 / 61세, 지체장애


황정용씨는 국민학생 시절 지팡이를 짚고 걸었다. '절뚝발이'라고 놀림을 받아 학교 가기가 싫었다. 아버지는 도장 파는 일과 시계 수리 일을 하셨다. 4학년이 되던 해 학교를 그만두고 기술을 배웠다. 섬소년이었던 정용씨는 뭍에 있는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탓에 가장이 되었다.  


도장을 파서 번 돈과 장애 수당으로 장애가 있는 어머니와 여동생, 나머지 4명의 동생이 고등학교를 마치고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도왔다. 하지만 2003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삶을 놓아 버리고 술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택배를 하던 막냇동생이 차에 태우더니 시설에 놓고 떠났다. 


시설에 머물던 정용씨는 재단의 비리를 알게 됐다. 장애수당이 인상됐으나 받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고 원장에게 요구해 받아냈다. 장애인 시설의 친인척 비리, 인권 침해, 장애인 무시 등 비합리적인 모습을 참을 수 없어 투쟁에 참여한 뒤 시설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시설이 싫어요 시설 사람들이 보기도 싫고 거기서 살기도 싫어요 집이라도 있으면 점포라도 얻어서 기술을 살려보고 싶어요." 


2009년 노숙 농성을 시작한 정용씨는 많은 활동가와 탈시설 노숙농성을 도와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누구도 우리를 이용하려 하지 않고 많은 힘을 보태줬다." 그동안 장애인으로 살며 받은 차별에 대한 적대심이 한층 낮아졌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정용씨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일을 겪는다. 여전히 사람을 믿고 만나는 일이 쉽지 않지만 탈시설을 통해 농성하며 만난 사람들과 항상 반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고 했다. 


정용씨는 인터뷰를 마치고 몇 달이 지난 2019년 7월 13일 이 땅에서 사명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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