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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Jun 19. 2023

수건 한 장이면 충분해.

어린 시절. 나에게만 특별했던 장소.


"그러니까 수건 한 장이면 된다는 거죠?"

"응. 수건만 가져와."


시골에서 맞이한 첫여름 방학, 동생은 엄마를 따라 소아과에 가고 나만 덩그러니 집에 남겨졌다. 따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병균들을 모두 털어내고 집에 돌아올 자신이 없어 포기했다. "빨리 와야 해. 혼자 있기 싫어." 동생에게 큰소리로 말했지만 알고 있었다. 소아과 선생님께서 번개처럼 진료를 한다고 해도 도심과 집은 왕복 2시간이라는 것을.


감꽃이 진 자리에 네모난 열매들이 하루에 하루를 더해 부풀어 올랐다. 잎과 잎 사이를 통과한 햇살이 평상에 노란 그림을 그렸다가 사라졌다. 바닥에서 주운 자갈 5개를 골라 평상에 앉았다. 돌들을 손등에 올리고 받다가 바닥에 던져버렸다. 텃밭에서 떨어진 열매들을 모아 선반에 놓고 참치캔 뚜껑으로 잘게 잘랐지만 5분을 넘기지 못했다. 마루 기둥과 기둥 사이에 묶어둔 고무줄을 발로 튕기며 넘었다. "아프리카 사람 마음씨가 좋아. 좋아 좋아~" 겨우 한 곡을 부르는 동안 시시해진 고무줄놀이.


그때 아랫집에 사는 미순이 언니가 나를 불렀다. 골목에서 맞추진 적이 있지만 그때마다 언니를 피해 집으로 들어갔다. 말을 붙이고 싶었지만 몇 번이나 실패했다. 초등학교 3학년과 중학교 1학년. 고작 4살 차이였지만 어릴 땐 그 차이가 어른처럼 느껴졌다.


"너 혼자 있어? 동생은?"

"엄마랑 병원 갔어요."

"그래? 심심하면 나랑 빨래터 갈래? 나도 오늘 혼자인데." 


돌담 틈으로 올라온 얼굴에 미소가 서렸다. 집에서 얌전하게 엄마를 기다려야 하는데 입 밖으로 그 말은 나오지 않았다. 동네에 빨래터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들어서 호기심이 동한 나는 "뭐 가져가면 되는데요?"라고 질문을 던졌다. 수건 한 장이면 된다는 말에 아빠가 평소 땀을 닦으시던 수건을 챙겨 언니 집으로 내려갔다. 빨지 않아 쉰내가 풀풀 올라왔지만 왠지 수건을 빨아오면 엄마가 좋아하실 것만 같았다.




집에서 10분 거리였던 국민학교를 지나 윗동네로 올라갔다. 처음 가보는 곳이라 혼자 집을 찾아갈 수 있을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여름 볕에 정수리부터 땀이 흘러내렸지만 언니가 한번 걸을 때마다 나를 두 걸음을 걸어야 했으므로 땀을 닦을 시간도 없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윗동네에서도 끝자락에 닿았을 때 움푹 팬 공간이 나타났다. 


"여기야." 네다섯 개의 돌계단을 언니가 먼저 내려갔다. 언니는 냇물의 시작점에서 방망이를 가져오더니 나무 그늘 아래 앉았다. "건너편에 앉아."라고 말하더니 가져온 분홍색 수건을 냇물에 푹 담갔다가 빼내고 돌판에 올려놓았다. 나는 멀뚱멀뚱 서서 빨래터 주변을 눈에 담았다. 중앙을 가르는 시원한 물줄기와 비스듬히 깎아 놓은 돌로 된 빨래판들. 집에 있는 플라스틱 빨래판보다 두 배는 크고 단단해 보였다. 빨래터 가장자리에는 자갈과 시멘트가 섞여 발라져 있었는데 마르기도 전에 들개와 길냥이가 다녀간 건지 귀여운 발자국이 여기저기 찍혀 있었다.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고 싶었다. 언니와 나만 있었다면 분명 발을 넣었겠지만 그 사이 아주머니들 몇 명이 내려오셨다. "투닥투닥 투다" 앉지도 못하고 서있는데 수건을 내리치는 방망이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계속 서 있을 거야? 너도 해봐 정말 재미있어." 자리를 잡고 앉아 아빠의 땀 밴 수건을 물에 넣었다. 그 짧은 순간에 온몸에 소름이 확 돋았다. 마치 소복 쌓인 눈에 손을 넣는 것만 같았다. 후덥지근했던 여름 바람도 빨래터에서는 산들바람이 되어 온몸을 식혀주었다.


"팡팡 팡팡" "투덕 투닥투닥 투닥" "첨벙첨벙" 옆에 앉은 아주머니들의 방망이 소리와 언니의 방망이 소리, 그리고 빨랫감이 물에 담가지는 소리가 빨래터를 수놓았다. 묘한 리듬감에 콧노래도 흘러나왔다. 물방울이 간간이 옷에 튀었지만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나는 건너편에 앉은 언니를 따라 방망이를 휘둘렀다. 혼자 공기놀이, 소꿉놀이, 고무줄놀이를 하는 것보다 100배는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하지만 동생과 엄마가 돌아오기 전 집에 돌아가야 했으므로 수건을 꽉 짜지도 못하고 서둘러 집에 돌아갔다.




그날 밤, 방에 누워 젖은 수건에서 일정하게 떨어지던 물방울을 따라 머릿속으로 집과 빨래터를 왕복하며 잠이 들었다. 다음 날에도 언니와 함께 동생의 손을 잡고 빨래터를 찾았다. 때때로 그곳을 찾은 언니 오빠 그리고 반 친구들과 빨래터에 흐르는 냇물을 거슬러 올랐다. 작은 물웅덩이에서 헤엄치던 고기들, 돌 틈 사이에서 손가락을 물던 가재, 여린 살에 달라붙은 산 모기의 공격에도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수건 한 장을 두르고 빨래터에 앉아 팡팡 방망이를 내리치는 즐거움엔 비할 수 없었다.


내가 좋아했던 장소를 아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커다란 빨래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흐르던 물줄기는 말라 잡초만 가득했다. 아이는 계속 이곳이 빨래터였는지 물었다. "그럼 이곳이 수건 한 장이면 충분히 행복했던 그곳이지." 동네를 걸어 내려오며 자꾸 멈춰 뒤를 돌아봤다. 다시는 찾지 않을 이곳에 어린 날의 추억을 묶어두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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