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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Jul 03. 2023

불편한 선생들과 이별하는 방법.

지루함, 권태, 무력증이여 안녕. 


지루함 :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같은 상태가 오래 계속되어 따분하고 싫증이 나다.

권태 : 어떤 일이나 상태에 시들해져 가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

무력증 : 나이가 들거나 병에 걸리거나 하여 온몸에 기운이 없고 힘을 쓰지 못하게 되는 증상.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노크도 없이 도둑처럼 들어와 내가 잠들어 있는 침대 옆에 빙 둘러앉았다. 밤의 장막이 걷힌 지 벌써 1시간이 훌쩍 지났다. 느껴지는 시선은 거북했지만 감은 눈은 뜨지 않았다. '오늘은 몇 명이나 될까.' 적어도 한 명 이상일 것이다. 눅눅하고 축축한 시선이 얽히다 부딪히고 다시 나를 향했다. 조용히 내리던 이슬비는 어느새 거세져 창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그들은 누워있는 내 몸에 세상의 무거운 것들을 하나씩 붙이기 시작했다. 돌, 납, 바위, 쇠를 비롯해 슬픔, 미움, 분노와 같은 무거운 감정들도 함께 붙였다. 몸을 일으킬 수 없었으며 이 상태로 화석이 되어버리는 건 아닌지 심장이 옥죄어 왔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얼마나 더 붙이려고? 왜 온 거야?"

"한두 번 본 것도 아닌 사이인데 새삼스럽게."

"그냥 이대로 누워있어."

"너도 편하잖아."

건조한 답변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나는 그냥 잠자코 그들의 하는 행동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의 방문은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부터가 아니었을까 싶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새 나라의 어린이, 아니 이제 청소년기로 넘어가는 그해 여름 나는 늦잠을 잤다. 7시 전에 눈을 뜨던 아이는 9시가 넘어서도 침대에 엎드려 미동도 없었다. 방학이 아니었다면 영락없이 지각이었을 것이다. 새벽녘 그것이 나를 찾아왔다. 우리는 대화를 나누지 않았으며 그것은 눈을 뜨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도 내 몸에 뭔가를 열심히 붙이고 있었던 것 같다. 아침에 은옥이와 함께 방학 과제를 하기로 약속했으나 나는 가지 못했다. 하루 종일 방 안에서 멀둥멀둥 창밖을 바라보며 시간을 죽였다. 숨을 거둔 시간이 내 안에 고여 썩어갔다. 나는 이 증상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맞춰 부는 태풍쯤으로 여겼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그들의 방문이 잦아지면서 알게 되었다.



<지루함, 권태, 무력증.>



대부분 지루함이 가장 자주 나를 찾았다. 나는 그들에게 선생이라 직함을 주었는데 마치 교사처럼 '이거 하지 마. 저거 하지 마.' 하지 말라는 것이 많았다. 하지만 겉보기에 나를 챙기는 척 입에 발린 소리뿐이었다. 지 선생은 삐쩍 마르고 신경질적인 노처녀 연상시켰다. 내가 의자에 앉아 노트를 펴면 그녀는 손에 들고 있는 기다란 막대기로 책상 끝을 톡톡 건드렸다. '노동이 몸만 쓴다고 노동이야? 머리 쓰는 것도 힘들어. 그냥 쉬어. 쉬는 게 남는 거야.'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모든 것이 따분해졌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그건 음악의 도움이 컸다. '됐거든.' 나는 다소 터프하게 지 선생을 무시하고 이어폰으로 귀를 막았다. mp3에는 내가 좋아하는 곡이 무한 재생되어 마음을 가득 채웠다. 댄스, 발라드, 팝송을 비롯 지루할 틈이 없었다. 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면 금세 기분이 좋아졌고 뭐든 하고 싶다는 자신감에 사로잡혔다. 잠시 후 지 선생은 다음을 기약하며 내게 등을 돌렸다.



권 선생은 지 선생과는 다른 이미지를 가진 남자였다. 170cm 키에 170kg. 그는 통통하게 살이 오른 누런 머릿니 같았다. 곳곳에 게으름이라는 알을 까고 내 반응을 살폈다.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세상은 잘 굴러가.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얼마나 좋아. 뭐 새로운 걸 찾으려고 발악이야. 하지 마. 하지 마. 어차피 해봤자 야' 그는 새로운 것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입고 있었다. 지 선생과는 다르게 권 선생은 밀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나 방법은 찾기 마련. 평소에 메모해 둔 다이어리를 폈다. 내가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정리된 페이지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구입하려고 했던 책들, 보고 싶었던 영화, 여행할 곳 등등 가장 아랫줄엔 이런 문구가 적어 두었다. 나는 그 문구를 큰 소리로 쩌렁쩌렁하게 읽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하자." 권 선생은 혀를 쯧쯧 찼다. 내게 더 할 말이 있냐는 식으로 그를 쏘아보자 풀이 죽어 증발해 버렸다. 권 선생이 사라지고 나서도 나는 여러 번 문장을 읽으며 이번 주, 이번 달에 할 일들을 꼼꼼하게 체크해 나갔다. 계획을 세울수록 설렘은 증폭되고 가슴은 뛰었다.



가장 만나기 싫은 선생은 바로 무선생이었다. 말 그대로 그는 얼굴과 몸 형태도 없이 이름만으로 존재했다. 그가 가까이 있다는 것을 나는 내 건강 상태로 짐작할 수 있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기운이 없었으니까. 하루아침에 3650일이 흐른 느낌적 느낌이랄까. 내 몸을 감싸던 생동감을 무선생이 야금야금 먹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먹어도 먹어도 배가 무르지 않는 위대한 선생이었다. 지 선생과 권 선생은 비교적 빠르게 이별할 수 있었으나 무선생은 달랐다.



10대보다 20대. 20대 보다 30대. 30대 보다 40대. 젊음의 정점을 찍고 하락할 때부터 무선생의 방문은 눈에 띄게 잦아졌다. '저 위대한 선생을 어쩌면 좋지.' 무거운 몸을 일으켜 메모장을 열었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분명 방법은 있을 거야. 뜸을 들이면 나만 힘들어.' 옷을 갈아입었다. 운동화 끈을 동여맸다. 발길이 닿는 곳으로 천천히 이동하며 온몸의 감각기관을 활짝 열었다. 이미 내가 일어섰을 때 무선생은 단념하는 듯했으나 다른 두 선생과 다르게 쉽게 포기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일주일에서 보름은 내 주위를 맴돌 것임을 알기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25년?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그들은 나를 찾았을 것이다. 마침내 눈을 뜨고 침대에서 일어나 암막 커튼을 열었다. 보란듯이 나는 내 몸에 붙어 있던 무거운 감정들에 툭툭 터는 시늉을 했다. 선생들의 노력은 몸 여기저기에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이제 나는 내 나름대로 이들과 헤어지는 방법을 터득했다. 



다이어리를 펴서 오늘 할 일들을 쭉 체크한다. 다음 달에 계획한 여름휴가지는 강원도.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여행계획이다. 운동복을 갈아입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1번으로 플레이시키는 음악은 언제나 2NE1 <내가 제일 잘 나가>.



방문을 열고 뒤를 돌아보니 3명의 선생들은 아직도 침대 끝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다음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잘 다녀오라며 손을 흔드는 지 선생이 가장 얄미웠다.

"잘 가. 다음엔 예고 좀 하고 오면 좋고. 아니어도 상관없어." 나는 씩 웃으며 방문을 상큼하게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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