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잘못이 아니야
<소년은 울지 않는다> 킴벌리 피어스, 1999
이 작품이 실화라는 것을 영화가 끝나고서야 알았다. 어떤 반전보다도 충격이었다. 이렇게 끔찍하지만 순수한 사랑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니.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이 한 문장으로 알려져 있다.
" 브랜던 티나(Brandon Teena, 1972년 12월 12일 – 1993년 12월 21일)는 미국의 트랜스 남성이다. 네브라스카 주 험볼트에서 남성들에게 강간 살해를 당했다." (출처: 위키피디아)
단 두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는 그의 짧은 인생을 영화 <소년은 울지 않는다>은 두 시간으로 늘려 그가 느꼈을 수치심, 사랑, 정체성을 오롯이 전달한다.
영화의 주인공 브랜든은 맥주를 좋아하고, 우연히 바에서 끌린 이성과 하룻밤을 보내기도 하는 이십대를 낸다. 브랜든은 바에서 만난 캔디스와 그녀의 친구들과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브랜든이 캔디스에게 집적대던 무리로 부터 구해주었기 때문이다. 그 친구들 중 라나가 있었다. 브랜든은 라나가 가라오케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한다. 캔디스의 친구 중에는 존과 톰이라는 남자들도 끼어있었다. 그들은 황량한 공터와 매캐한 공장 굴뚝 연기로 가득한 폴즈 시티라는 곳에 살고 있다. 캔디스에 집에 얼마간 머물게 되는 브랜든. 그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브랜든을 남성이라고 인식한다.
라나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벗어나고픈 욕망이 있다. 모든 것이 지긋지긋하다는 듯 냉소적인 라나지만 브랜든과 있을 때만큼은 설렘을 느낀다. 둘은 점점 가까워지고 호숫가 근처에서 낭만적인 하룻밤을 보낸다. 라나만큼은 브랜든이 여자이든, 남자이든 중요하지 않다. 그저 '브랜든'이라는 사람 그 자체면 충분하다고 받아들인다. 브랜든도 똑같이 라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었기 때문이다.
가까이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라나의 친구들은 브랜든에 대한 의혹을 품는다. 존은 라나와 가까워지는 브랜든을 질투하기도 한다. 급기야는 브랜든의 방에서 발견된 탐폰, 스크랩해둔 성전환 수술 기사 등을 보고 추궁하기 시작한다. 존과 톰은 그가 라나를 속여서 꼬셨다며 폭행을 가하고 브랜든의 속옷을 강제로 벗기기까지 하면서 라나에게 여자인지 똑바로 보라고 다그친다. 브랜든은 그렇게 모욕과 수치를 당한 것도 모자라 두 남자에게 강간까지 당한 것이다.
가장 가슴이 아팠던 장면은 살해를 당하기 전, 강간 폭행을 당한 후 경찰 조사를 받는 장면이었다. 조사관이 강간을 당했는지 재차 물어보아도 브랜든은 고개를 숙인 채 그런 일은 없었다고 웃으며 말하려 노력한다. 그 모습이 다리도, 날개도 부러진 새처럼 보였다. 자신이 부당하게 당한 폭력까지도 당당하게 밝힐 수 없는 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조차 가늠할 수 없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날 밤의 기억은 브랜든을 괴롭히고 트라우마로 남았다. 브랜든은 본인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자책한다.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남들을 속였기 때문이라고.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 될 수 없는 폭력을 저지른 이들은 조금의 반성도, 죄책감도 없는데 왜 당한 이는 모든 걸 본인의 잘못으로 돌리려 할까. 그들이 그날 밤에 벌인 폭력은 브랜든이라는 한 사람의 존재를 짓밟은 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랜든은 마지막 남은 희망을 놓지않고 라나와 함께 도망치기로 하지만 그 마저도 이루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 속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혼자 남아 외롭게 떨고 있는 브랜든에게 절대 너의 잘못으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니라고, 너는 그저 자신의 모습 그대로 솔직하게 살았을 뿐, 아무 잘못이 없다고 말해주며 토닥여주고 싶었다. 피해자가 자책의 감정을 가지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다. 나만 제대로 했으면. 내가 그 곳에 가지 않았다면. 내가 조금만 조심했더라면. 반면 가해자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합리화한다. 범죄의 피해자가 되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자책을 하면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다 내 잘못이지, 내가 잘하면 되지 라며 삭히는 것이 오히려 해결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다. 나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새로운 곳에서 라나와 결혼하고 싶다는 꿈을 이루진 못했지만, 브랜든은 영화 속에 남아 그때는 받지 못했던 이해와 공감을 받고 있다. 그리고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