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한 영화 애호가의 왜 좋냐면⌟ - 스티븐스필버그의 레디플레이어원
스티븐 스필버그의〈레디 플레이어 원〉은 이야기보다 먼저, 그 이야기를 만든 사람을 드러내는 영화였다. 내가 이 영화에서 본 것은 노장 감독의 회심의 기술이 아니라, 늙었지만 늙지 않은 한 사람의 태도였다. 그리고 그 태도를 설명하기 위해 내가 붙잡은 말은 이것이다.
“고의로 뻔뻔하게 동심을 가장한 성숙.”
이 글은 그 뉘앙스를 중심으로, 몇 가지 층위에서 스필버그라는 어른을 정리해보려는 시도다.
많은 거장들이 나이를 먹고 나면, 두 방향 중 하나로 기울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과거의 자기를 박제하며 자기 전설을 관리하는 방향, 다른 하나는 개인적 언어와 형식 실험에 침잠해 점점 난해해지는 방향이다.〈레디 플레이어 원〉의 스필버그는 이 둘 모두를 비켜간다. 그는 분명 노장이고, 필모만 놓고 보면 ‘거장’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보이는 것은 ‘거장 의식’이 아니라, 여전히 게임과 모험을 사랑하는 현재형의 소년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동심’이 과거형 추억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영화에서 동심은 회상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작동하는 감각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옛날이 좋았지?”라는 수동태가 아니라 “나는 지금도 이걸 사랑한다”는 현재형의 직설에 가깝다. 내가 말하는 고의로 뻔뻔하게 동심을 가장한 성숙-이라는 표현은 이 지점을 가리킨다. 스필버그는 자기 나이를 모르는 척 순진한 소년 흉내를 내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나이를 다 인지한 상태에서, 일부러 소년의 자리를 다시 선택한다. 그 선택에는 쑥스러움 대신, 의도적인 뻔뻔함이 깔려 있다. 이것은 무지가 아니라, 경험 위에 세워진 태도다.
이 영화는 겉으로만 보면 온통 레퍼런스와 향수로 이루어져 있다. 80년대 팝컬처, 게임, 영화의 파편들이 화면을 가득 메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노스텔지어는 관객의 추억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보통 회고는 비주얼적 노스텔지어에 의존한다. 익숙한 디자인, 음악, 색감으로 과거의 감각을 재현하고, 관객의 기억을 자극해 감정을 끌어올린다. 이때 과거는 일종의 상품이 된다. 과거의 정서를 꺼내와, 현재의 감동을 만들어내는 재료로 쓰는 식이다.〈레디 플레이어 원〉은 이 흔한 함정을, 놀라울 만큼 피한다. 여기서 레퍼런스는 “너 이거 기억나지?”라고 눈치를 주는 장치라기보다, 어릴 때 우리가 사랑했던 ‘놀이터의 공기’ 같은 것으로 등장한다. 스필버그는 ‘모양’으로서의 과거를 재현하기보다, 그 시절의 동심의 에센스만을 지금의 세계 속으로 이식한다. 그래서 이 영화의 회고는 노스텔지어를 소비하지 않는 회고다. 과거를 박제해 전시하기보다, 과거가 지금도 유효한 힘으로 남아 있음을 증명하는 방식이다. 그렇기에 영화의 시선은 실제로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향해 있다.
스필버그는 이미 리얼리즘도, 정치적 서사도, 비극도 다 해본 사람이다.〈쉰들러 리스트〉와 〈뮌헨〉을 만든 감독이 현실의 무게와 폭력을 모를 리 없다. 그렇다면 거장이 된 이후의 ‘자유’는 보통 어디로 향하는가.
대개는 더 난해한 구조, 더 실험적인 형식, 더 어려운 주제 쪽으로 향한다. 하지만 스필버그는 그 자유를 엉뚱한 곳에 쓴다. "핍진성 따위는 잠시 내려놓고, 그냥 재밌는 모험과 해피엔딩을 위해 쓰자.”
이 선택을 설명하기 위해 내가 떠올린 비유는 바로 이것이다.
국가무형문화재가 만든 레벨 1짜리 장난감, 그런데 모서리마다 마감이 문화재급.
겉으로 보면 〈레디 플레이어 원〉은 아주 단순한 구조의 장난감이다. 선과 악이 분명하고, 모험과 퀘스트가 있고, 우정과 사랑이 있고, 마지막엔 해피엔딩이 있다. 아이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레벨 1 서사다. 하지만 이 단순함을 가능하게 만드는 디테일의 촘촘함은 장인의 영역이다. 액션의 리듬, 샷 전환의 타이밍, 인물들의 움직임과 시선, 음악이 들어오고 빠지는 지점, CG와 실사의 결합… 이런 모든 요소가 마치 국가무형문화재 장인이 만든 목제 장난감의 균형감처럼 정교하다.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복잡함을 본 뒤, 일부러 다시 단순한 형태로 돌아간다. 이 되돌아감이 바로 “다 겪어본 어른”의 선택이다.
이 영화의 결말은 요즘 기준으로 보면 유난스럽게 봉쇄된 해피엔딩이다.
악당은 확실하게 패배하고, 주인공은 보상받고, 사랑은 이루어지고, 세계는 나아진다. 틀어막지 않은 틈이 거의 없다. 나는 이 결말을 보며 이렇게 느꼈다.
감독의 폭정으로 만들어진 해피엔딩.
여기서 ‘폭정’이라는 말은 부정적이라기보다, 작가의 의지로 현실의 논리를 밀어내는 행위를 가리킨다. 스필버그는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낙관자가 아니다. 그렇기에 이 해피엔딩은 “세상이 원래 좋다”는 말이 아니라, “내 영화 안에서만큼은 좋게 만들겠다”는 의지의 선언에 가깝다. 이 영화는 비극의 씨앗, 씁쓸한 여운, 열린 결말을 의식적으로 거부한다. 요즘 영화들이 ‘성숙함’이라는 이름으로 남겨두는 균열들을, 여기서는 뻔뻔하게 본드로 다 메워버린다. 이 지점에서 〈레디 플레이어 원〉은 장르 영화라기보다, 스필버그가 대중문화와 영화라는 매체에 바치는 사랑가에 가깝게 변한다.
사랑 고백의 문장은 논리보다 의지에 가깝다.
이 영화의 결말 역시 그렇다.
표면적으로, IOI와 놀란 소렌토는 전형적인 악덕 자본가 빌런이다. 가상 세계를 독점하고, 데이터를 수집하고, 부채로 사람들을 묶어두고, 돈으로 승리를 사려 한다. 지금 현실의 대기업, 빅테크가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영화는 마지막에 묘한 장면을 건넨다. 총을 쏠 수 있었던 순간, 소렌토는 주인공의 눈물을 보고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다. 그는 오아시스를 처음 사랑했던 세대이기도 했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며, 이 영화의 동심이 단순한 선악 분리와는 다른 결을 가진다는 걸 느꼈다. 이 영화의 동심은 “악당도 사실은 처음에는 사랑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 복잡성을 알면서도, 결국 악당은 패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건 자본가를 면죄하는 시선이 아니라, 인간이 타락에 이르는 경로를 이해하는 어른의 시선이다. 그 이해 위에서, 동화적 정의를 다시 한 번 선택한다. 여기에도 “동심을 가장한 기만”이 있다. 하지만 그 기만은, 세계의 복잡성을 삭제하기 위한 기만이 아니라, 사랑을 지키기 위한 기만에 가깝다.
다만 이 영화의 메시지가 완전히 무결해 보이지는 않는 곳이 있다. 바로 마지막의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오아시스를 닫는다”는 결심이다. 주인공은 이미 게임에서 승리했고, 오아시스의 지분을 얻었고, 사랑도 얻었고, 빈민가를 벗어났다. 그런 인물이 “이제는 현실도 살아야 한다”고 말할 때, 이 메시지는 어딘가 특권의 뉘앙스를 띤다. 현실이 견딜 만한 사람만이 “현실도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다.
여전히 트레일러에 남아 있는 사람들, 현실에서 탈출구를 찾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오아시스는 단순한 유흥이 아니라, 거의 유일한 도피처이자 숨 쉴 구멍일 수 있다. 그들에게 “적당히 즐겨라”라는 말은, 다소 뻔뻔한 조언처럼 들릴 수 있다. 그래도 “이기기만 할 생각을 하지 말고, 즐기는 게임을 하자”는 메시지는 유효하다.
가난과 불평등 속에서도, 오직 승리와 효율만을 좇는 태도는 결국 IOI와 닮아가기 쉽다. 그러나 이 부분의 불편함은, 스필버그의 낙관이 가진 계급적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바로 이 미세한 불일치 덕분에, 영화는 완벽한 위무물이라기보다, 사랑가와 현실 인식 사이에서 약간의 긴장을 남긴다. 그리고 나는 그 균열을 인지한 채로도, 여전히 이 해피엔딩을 받아들인다. 이건 사랑가니까.
결국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내가 본 스필버그는, “다 겪어본 어른은 모르는 아이와 같은 지경에 이른다”는 역설을 몸으로 증명하는 사람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진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이 알아버렸기 때문에, 일부러 다시 아이의 자리로 돌아가는 어른. 복잡성을 이해한 뒤에 단순함을 선택하고, 비극의 가능성을 알면서도 해피엔딩을 밀어붙이고, 냉소의 유혹을 알면서도 끝내 사랑고백을 택하는 사람.
그가 만든 영화 한 편을 보고 “좋은 어른 같다”는 감상이 먼저 떠오른 이유는, 바로 이런 태도 때문이다. 영화는 때로, 그 뒤에 선 사람을 보여준다.〈레디 플레이어 원〉은 늙었지만 늙지 않은 한 사람, 자기가 사랑해온 것들을 끝내 부끄러워하지 않는 한 사람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바라보며, 나는 단순히 한 거장을 존경하게 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나도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는 마음에 가까운 무엇을 느낀다.
올해 뒤늦게 본〈멀홀랜드 드라이브〉가 자연스럽게 떠오르기도 했다.
영화 혹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구조적 폭력을 데이비드 린치와 스티븐 스필버그는 매우 다르게 말한다.
비교적 젊은 시절의 린치는 “이 시스템은 꿈을 삼키는 괴물이다”라고 심오하고 진지하게 폭로했다.
악몽이 된 꿈을 낱낱이 찢어보이며 관객으로 하여금 그 불안을 온전히 체험하게 한다. 반면 70대를 앞둔 스필버그는 세상 다 살아본 사람처럼 같은 어둠을 보면서 무얼 그리 심각하냐 묻고는, 웃으면서 비판하는 것이다.
“그래, 나도 악몽인 건 아는데. 그래도 이 꿈을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 자체가 노년의 저항처럼 느껴졌다.
아마도 둘의 차이는 비판의 강도가 아니라 지켜내고 싶은 것의 차이다.
린치는 상처를 보여주기 위해 꿈의 균열을 벌려놓고, 스필버그는 사랑을 지키기 위해 뻔뻔하게 그 균열을 봉합한다. 둘 다 같은 세계를 알고 있다. 하지만 한 명은 악몽의 진실을 드러내고, 한 명은 꿈의 진실을 굳이 지켜낸다. 더 살아본 사람의, 끝내 살아남은 강한 자의 고의적 낙관이다.
그 어렵다는 귀여운 할아버지가 되는 데 성공한 사람.
다 알고도 귀여운 척하는데 성공한 진짜 무서운 사람.
아마 그 지점에서, 이 영화는 이미 충분히 제 역할을 다한 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