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선물
런던에서의 겨울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변덕스러운 날씨를 감추기라도 하는 듯 도로를 따라 늘어진 전구 장식은 밤낮을 밝혔고 끝없이 이어진 쇼윈도는 온통 초록과 빨강으로 화려하게 치장했다. 런던은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두고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는 나와는 상관없다. 오히려 연말이 다가올수록 조급증은 비례해서 커져갈 뿐이었다.
나의 머릿속은 두 가지 질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일자리 있어요?'
'싸게 나온 티켓 있어요?'
나에게 런던에서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런던 공연판에서 일을 해보는 것, 그리고 공연을 많이 보는 것이었다.
백팩에는 십 수장의 이력서와 절대 쓰지 않을 듯이 꼬깃꼬깃 접힌 20파운드 지폐가 항상 자리를 차지했다.
공연장을 지날 때면 어김없이 들어가 이력서를 건네며 '일자리 있어요'라고 질문을 던졌고, 뒤 이어서 '싸게 나온 티켓 있어요?'하고 물었다. 4개월 간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런던 시내를 헤맸다. 그리고 여전히 변화 없이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판이다.
집으로 가려면 하이드파크를 지나게 되는데, (비싼 1 존의 지하철 요금을 감당할 수 없어 교통체증을 핑계로 지하철을 탈 수 있는 2 존까지 걸어가곤 했다) 하이드파크를 가로지르면 로열 알버트 홀(Royal Albert Hall)을 만날 수 있다. 1871년에 개관한 영국에서 가장 큰 콘서트홀, 영국에서 가장 큰 파이프 오르간, 나에게는 낯선 원형극장, 원형극장의 단점인 소리 문제를 해결한 음향 공학 등 이것만으로도 로열 알버트 홀에 가볼 이유는 충분하다. 허름한 차림의 나는 백팩을 메고 매주 로열 알버트 홀을 들렀고 매번 빈손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둔 그 날도 티켓부스로 향했다.
'싸게 나온 티켓 있어요?'
'할인 티켓은 있는데 가격은 이 정도 돼요' 할인이 무색하게 비쌌다.
'더 싼 티켓은 없나요? 학생 할인 티켓은 있는지요?' 나이가 무색하게 국제학생증을 무기로 되물었다.
'안타깝게도 없네요' 지난 몇 개월간 꾸준히 들었던 익숙한 대답이다.
이내 당연하다는 듯이 티켓부스를 뒤로하고 털레털레 돌아갔다.
'헤이 미스터' 이내 다시 '헤이 미스터' 나를 불러 세웠다.
'저요?'
'네 당신요. 잠시만 오시겠어요?'
'여기 티켓요'하며 크리스마스 콘서트 티켓을 건넸다.
티켓을 손에 쥐고 '할인 티켓이 생각났나 보구나' 하고 백팩에서 20파운드를 찾기 위해 손을 휘저었다.
'돈은 필요 없어요, 당신을 초대하는 겁니다'
'네? 왜 저에게?' 대답이 없었다. 그냥 웃기만 했다.
'너무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감사합니다'를 몇 번하면 정말 감사함을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다시 발길을 돌렸다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그는 넓은 로비를 가득 채울 만큼 큰소리로 외쳤다.
'감사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나는 들리지도 않을 목소리로 읊조리며 손을 흔들었다.
가난한 동양인에 대한 동정심인지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풍요로운 인정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아니면 몇 개월간 들락거리던 나에게 친근감이 생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공연 당일, 런던에서는 절대 입어 볼 일이 없었을 것 같았던 슈트를 꺼냈다. 꾸깃한 슈트를 정성스레 다려 입었다. 어쩌면 공연을 보는 날까지 그 사람에게 허름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천정까지 가로지른 파이프 오르간을 중심으로 둥글게 둘러진 5,000여 석의 객석은 웅장했고 트레이드마크처럼 천정에 주렁주렁 매달린 일명 비행접시는 인상적이었다.
관객과 오케스트라, 합창단 모두가 참여하는 콘서트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휩싸였고, 나 또한 온몸으로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London Philharmonic Orchestra와 Choir였던 것 같다.)
할인 티켓을 구하려고 발품을 팔고, 배우 얼굴도 보이지 않는 맨 뒷자리도 감지덕지하던 내게는 다시없을 과분한 공연이었다.
이 후로도 여전히 백팩을 메고 같은 질문으로 공연장을 다녔다. 몇 달이 지나도 여전히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듣지 못했다. 그러나
대가 없이 받은 티켓과 그곳에서의 경험은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충분히 보상받았다.
1871년 개관한 영국 최대 규모의 로열 알버트 홀은 빅토리아 여왕이 남편 알버트를 추모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9,999개의 파이프로 만들어진 웅장한 파이프오르간은 로열 알버트 홀하면 떠오르는 상징과도 같다. 또한, 명물처럼 회자되는 천정에 매달린 비행접시는 확산재인데, 메아리 현상을 줄이기 위해 설치한 흡음재로 인해 작아진 소리를 높이기 위해 설치되었다.
로열 알버트 홀은 콘서트뿐만 아니라 스포츠, 박람회 등 다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