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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Jul 19. 2020

<사냥의 시간>, 기울어진 심판장

'시간의 사냥'이라 불리게 된 영화에 대해

영화 <사냥의 시간>(2020)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사냥의 시간’은 ‘헬조선’ 탈출을 계획하는 미성숙한 남성들의 이야기다. 은행을 털었다가 3년 징역살이를 하고 나온 준석(이제훈)은 꿈을 위해 모아둔 돈이 원가 가치 폭락으로 인해 휴지조각이 됐단 사실을 알고 망연자실한다. 그는 친구 장호(안재홍), 기훈(최우식), 상수(박정민)와 함께 불법도박장 금고 속 달러를 훔치기로 하고, 감옥에서 알게 된 불법무기상 봉식(조성하)에게 각종 무기를 조달받는다. 극중 인물들은 주어진 상황 중 가장 무모하고 위태로운 선택을 거듭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돌려받는다.


 오프닝 시퀀스는 이러한 영화의 정체성이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장호와 기훈은 편의점 안에서 고함을 지르고 거친 욕설을 숨 쉬듯 뱉으며 듣는 이의 눈을 찌푸리게 한다. 두 사람은 장호가 입은 옷이 서로 자기의 것이라고 우기고, 기훈이 물건을 계산하기 전 장호에게 미리 돈을 받았는지를 두고 또 한참 말싸움을 벌인다. 나중에 확인하거나 따져 물어도 될 일이지만, 두 사람은 당장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진실이라 믿으며 강하게 밀어붙인다. 카메라는 두 사람보다 조금 더 키가 작은 누군가가 이들을 따라가는 것처럼 움직인다. 구제 옷을 팔아 생활비를 벌자는 장호와 ‘가오가 떨어져서’ 싫다는 기훈의 뒷모습, 계산대에 선 두 사람의 표정, 기훈의 손에서 직원의 손으로 넘겨지는 지폐, 가게를 나서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차례로 보여준다. 계산을 하는 편의점 직원, 즉 정당한 노동을 통해 돈을 벌고 있는 여성은 편협한 주인공들의 시선을 그대로 따르는 영화의 안중에 없다.


장호(안재홍),기훈(최우식), 상수(박정민) 모두 눈앞에 닥친 현실을 외면한다.  ⓒ<사냥의 시간> 스틸


‘더는 잃을 것이 없다’며 무모한 계획을 밀어붙이는 준석의 곁에는 가족만큼 소중한 친구들이 있다. 장호와 기훈은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현재’를 개탄하며 범죄를 정당화하지만, 정작 그들은 월세로 살고 있는 아파트 발코니 창에 서서 집도 차도 없이 밖에서 불을 피우고 있는 다른 이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상수는 금고 털이 작전 하루 전 도박장에서 정체불명의 사내들을 목격하고도 미지의 변수를 일당에게 알리지 않은 채 계획을 강행한다. 이때 영화는 극중 인물과 같은 눈높이에서 그들이 보는 것들을 보여주고 동일한 정보 값을 제공함으로써, 관객이 매 장면, 즉 인물들이 살아가는 순간을 감각적으로 인지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 밀접한 거리는 그들이 가진 모순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해 관객의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인물들은 자신과 관객 모두의 눈앞에 있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면서 미래를 위한 목표만을 향해 거침없이 질주한다. 그러나 완벽히 성공했다고 믿으며 환히 웃을 때, 외면해왔던 현실의 실체가 추격자 한(박해수)과 함께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경쾌한 케이퍼 무비인양 빠르게 진행돼 온 영화가 진짜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준석이 노린 금고는 메인 금고가 아닌 환전용 보조 금고였고, 멋모르고 빼돌린 하드디스크는 ‘윗선’의 검은돈이 연결된 비밀장부였다. 한은 준석 일당이 대충 미루어 짐작한 수준의 조직폭력배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인간 사냥’을 즐기는 자다. 무자비한 살인과 신체 훼손을 일삼고 목표물이 격렬히 도망칠수록 희열을 느끼는 등 상식과 경험 밖에 위치한 그는, 앞서 인물들이 남겨뒀던 께름칙한 지점들, 관객이 함께 있으면서도 막을 수 없었던 과오를 응징한다. 더는 잃을 것이 없다고 자신했던 준석의 소중한 친구들을 앗아가고, 장호와 기훈을 나락으로 떨어트린다. 봉식은 준석이 위험한 일을 꾸민다는 것을 눈치채지만 “법 밖에 있는 세상이 더 무서운 것”이라면서도 구태여 그를 말리지 않았다가 화를 당한다. 봉수(조성하)도 한을 죽일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놓으면서 결국 부메랑을 맞는다. 이들은 모두 도시숲에 던져진 사냥감이 되어 ‘현실을 회피한 대가’를 치르게 되고, 관객 역시 기괴한 소음과 유혈이 낭자한 시퀀스 한가운데에 놓이며 이 과정에 동참한다. 요컨대 영화는 ‘현실 직면’이라는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 인물과 관객을 대상으로 ‘징벌’을 내린다.


준석(이제훈)이 맞닥뜨린 한(박해수). ⓒ<사냥의 시간> 스틸



문제는 영화가 메시지를 강박적으로 반복할 뿐, 스스로 현실을 직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관객을 정면으로 빤히 쳐다보는 오프닝 시퀀스의 노인부터 창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는 엔딩 무렵의 준석까지, 영화에서는 시선과 시선이 마주하는 순간이 노골적이라 느껴질 만큼 빈번히 등장한다. 하늘을 바라보는 기훈의 뒷모습,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기훈의 앞모습, 다시 하늘을 바라보는 기훈의 뒷모습을 번갈아 배치하는 식이다. 이러한 교차는 기훈과 하늘이 서로 바라보고 있는 듯한 구도를 형성한다. ‘꿈’과 ‘현실’도 점차 마주 보게 된다. 하와이로 떠나고 싶다는 준석의 막연한 꿈이 현실의 계획으로 구체화될수록, 실제 현실은 악몽보다 끔찍하게 변해간다. 준석은 꿈에서 아주 사실적으로 죽어가는 상수를 목격하고, 현실에선 게임이나 서부영화처럼 보이는 총격전을 벌인다. 마침내 꿈과 현실이 완전히 맞아떨어지는 건 준석이 다시 한국으로 향하는 배 위에 몸을 실을 때다. ‘헬조선’을 벗어나기 위해 사투를 벌이던 그는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 후에야, 싸워서 바꾸지 않는 이상 어디든 지옥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얻고 ‘그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영화는 이 직관적인 귀결을 영화 밖으로 전달하는 데에 실패했다. 영화는 ‘헬조선’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한의 존재로 실체화했을 뿐, 그를 들여다본 적이 없다. 왜 그토록 능숙하게 총기를 다루는지, 유희만을 위한 사냥에 집착하게 됐는지 등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의 기원을 생략하는 것은 곧 한국이 왜 ‘지옥’으로 불리는 사회가 되었는가를 설명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개봉 후 쏟아진 관객들의 혹평이 이를 방증한다. 관객의 의구심은 미처 다 해소되지 못한 호기심보다는 ‘일련의 경험들이 모두 무의미하게 흩어진 허무함’에 가깝다. 내내 직면을 말하며 벌을 내렸던 영화가 사실은 아무것도 직면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면 ‘영화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 혼란스럽게 마련이다. 때문에 앞서 영화가 던져둔 복선에 어떠한 함의가 있었던 것인지 되짚어갈 수밖에 없다. 윤성현 감독은 이와 관련, 영화의 설득력이 빈약하다는 평가에 대해 “아이들 시점 중심으로 이야기를 짰는데 순간순간 반전이나 떡밥을 기대하며 그 너머 이야기를 해주길 바라는 시선으로 보면 지루할 수 있다. 아이들이 살아남길 응원하는 마음으로, 가능한 한 휴대폰 아닌 큰 화면에서 사운드 빵빵하게 들으면서 감정이 흘러가는 대로 봐달라(중앙일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경험을 통한 교훈 체득을 다시금 강조한 셈이다. 그러나 영화가 스스로 ‘벌할 자격’에 대한 당위성을 획득하지 못한 상황에서 부여하는 징벌적 경험은 효력을 상실한다.  


중심인물의 감정선을 충실히 따라가는 영화. ⓒ<사냥의 시간> 스틸



이는 ‘사냥의 시간’이 애초에 근간으로 둔 편협성과 무관하지 않다. 영화는 ‘헬조선’을 철저히 일부의 경험으로 제한한다. 경제 위기, 공권력 부패, 기업 횡포, 휴전 국가의 트라우마와 징병제 등 한국사회가 겪어왔으며 여전히 안고 있는 문제들을 재현하는 한편, 이 모든 것들을 젊은 남성들의 경험으로만 구성한다. 회피하지 말라는 교훈이 와 닿지 않을 정도로, 영화는 지옥에서 실재하는 많은 현실을 의도적으로 지워냈다. 물론 영화가 모든 나이, 성별, 정체성을 다룰 필요는 없다. 그러나 사회라는 지옥도를 그리는 척, 실제 지옥을 살고 있는 현실의 존재들을 선별적으로 지워버리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그나마 비중 있게 등장하거나 언급되는 여성은 ‘아들을 둔 엄마’인데, 중심인물의 약점으로서만 소비된다. 이때 준석, 장호, 기훈, 상수의 엄마가 모두 죽었거나 죽음을 앞둔, 혹은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로 묘사된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이들은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채로, 준석 일당보다도 먼저 벌을 받고서 프레임 밖으로 사라진다.


이러한 영화의 방향성은 시나리오 집필이 시작되기 직전 해(2015년)에 발간된 소설 ‘한국이 싫어서’의 반대급부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설은 20대 여성 계나를 통해 한국사회가 왜 그들에게 ‘지옥’이 됐는지를 시사한다. 계나는 호주 이민을 만류하는 남자친구에게 “어차피 난 여기서도 2등 시민이야. 강남 출신이고 집도 잘살고 남자인 너는 결코 이해 못해”라고 말한다. 스스로를 ‘사자에게 쫓기는 톰슨가젤’에 빗댄 그는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워서 이기는 게 멋있다는 건 안다”면서도 이민은 도망이 아니라 행복을 찾아 떠나는 모험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사냥의 시간’은 이러한 도피가 ‘헬조선’을 지옥으로 있게 하는 주요 원인이라 상정하고 살기 위해 달리는 가젤들을 향해 총알을 퍼붓는다. 엄마들을 저항의 여지도 없이 조용히 사라지게 했듯, 여성이라는 존재를 프레임 밖으로 밀어냈듯. 주조연은 물론 배경으로 지나가는 행인 대부분을 남성으로 배치하며 미성숙한 ‘남성’들의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의도 여부와 상관없이, 영화는 사자를 무찌르는 가젤만이 살아남을 것이라는 표제 하에 숲을 벗어나려 애썼던 수많은 가젤들을 죽여 없앴다.


사냥의 시간은 무엇을 심판하기 위해 필요했는가. ⓒ<사냥의 시간> 스틸



영화의 궤는 악몽을 끝내려면 지옥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안고 차라리 먼저 사냥을 시작하겠다며 총을 드는 준석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빛을 등지며 보이지 않는 공포를 자아내는 건 원래 한의 몫이었다. 그러나 미지의 존재였던 한이 ‘이재신’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되자, 끝내 한국으로 돌아가는 준석이 관객이 볼 수 없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한이 이전엔 준석과 같은 처지였을 수도, 돌아온 준석이 추후 한보다 더한 살인자로 변모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남겨둔 셈이다. 이러한 인물 설정은 교훈을 내세우며 폭력의 전시와 체험을 장르적 유희로 삼는 영화 자체와 닮아 있다. 영화는 끝까지 구조의 자리에 불완전한 개인을 놓아두고, 그들의 몰락을 스펙터클로써 사용한다. 영화가 생생한 시청각으로 전달하는 순간들은 ‘직면하면 살 것’이라는 조언보다는 ‘도망치면 죽을 것’이라는 협박에 가깝다. 또한 이토록 폭력적인 방식으로 전달하는 ‘헬조선’은 실제 현실을 사는 약자들과 그들을 둘러싼 차별이 배제된 채 교묘히 다시 그려진 세상이다. 지옥을 재생산하는 것 외에 어떤 성취를 이뤘는가는 불분명하다. 그렇다면, ‘사냥의 시간’의 메시지가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되었는가와는 별개로, 궁극적으로 사냥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곱씹어볼 일이다. 영화가 겨눈 총구가 향하는 곳은 ‘헬조선’인가, 아니면 한국을 ‘헬조선’이라고 부르며 도망가고자 하는 가젤들인가? 지옥을 없애기 위한 사냥이었나, 아니면 지옥을 갖기 위한 사냥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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