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곗바늘이 멈출지라도
춘자가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으로 내게 준 선물은 '세일러문' 탁상시계였다. 특정 캐릭터 모양의 시계로,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에 해당하는 주제가의 멜로디를 다소 조악한 기계음으로 우렁차게 울려댔다. 매일 아침마다 무한 반복되는 노래에 이제는 제발 솔직해지자고 절규하며 머리 위 버튼을 누르면 "굿모닝"하고 인사를 건네던 그 시계는 내 머리맡에서 얼마간 머물다가 곧 안방으로 자리를 옮겨가 아빠의 출근을 책임졌다. 시계는 스마트폰이 등장하고 나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고, 언젠가부터는 스스로 말하지 않았다. 시곗바늘은 잘만 가는데 그 지겨운 아침 인사는 좀처럼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계가 멈췄다.
춘자는 그 세일러문 시계를 종로 3가 어느 금은방에서 사 왔다. 그의 고향 친구가 운영하는 가게인데, 만화영화도 손주의 취향도 모르는 춘자가 대뜸 당시 가장 인기 있는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를 골라온 것을 보면, 아마도 친구에게 제일 잘 나가는 것을 추천받은 모양이었다. 춘자에게 그곳은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서 가장 좋은 물건을 살 수 있는 공간이었다. 10년 전쯤 내 친구 애경이 생애 처음으로 금 한 돈을 사고 싶어 금은방을 알아봤을 때, 나는 그곳을 떠올리며 춘자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춘자는 기쁜 마음으로 조금은 신이 나서 종로 3가의 후미진 골목을 향해 앞장서 걸었다. 까막눈을 벗어나게 해 준 스승을 위한 선물을 고르러 갔을 때도, 선재와의 결혼을 앞두고 패물을 고민하는 수경과 동행할 때에도, 춘자는 그렇게 신나 했을 터였다. 구부정한 무릎으로 천천히 보폭을 옮기던 그의 당당함과 나름의 서두름이 비쳤던 그날의 뒷모습은 지금 이 순간에도 눈앞에 선명히 떠오른다.
하지만 세일러문 시계가 끝내 시곗바늘까지 움직이지 못하게 됐듯, 시간이 흐르면서 익숙하게 존재했던 것들은 하나둘 사라진다. 춘자의 단골 금은방도 지금은 없는 가게가 되어버렸다. 어느 날 종로 3가의 재개발이 확정됐고, 금은방은 오래도록 지켜왔던 자리에서 비켜나야 했다. 중앙시장에서 맛있는 꿀떡을 팔던 떡집도, 그 앞에서 '공갈빵'을 팔던 노점상도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춘자와의 추억도 그가 기억하는 세상도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그러나 기능을 잃게 된 지 10년이 훌쩍 넘은 시계가, 유치한 디자인에 공간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그 고물이, 지금도 여전히 본가 장식장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작은 위안을 준다. 쓸모없는 물건들이 자리 차지하는 게 싫다며 뭐든 버리고 보는 수경에게도, 춘자가 자신의 딸에게 준 첫 생일 선물은 차마 놓을 수 없는 기억 같은 것이었다. 그게 수경이 춘자를 기록하는 방식이었다. 모두가 각자의 방법으로 춘자를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