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란 Feb 09. 2022

5. 춘자와 글

글을 안다는 것은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글을 아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제약을 안고 살아야 한다. 책을 읽지 못할 뿐 아니라 TV 방송의 자막, 각종 계약 문서, 심지어는 거리의 간판 조차도 읽을 수 없다. 까막눈이었던 춘자는 성인이 되고 나서도 한참 동안이나 그런 삶을 살아왔다. 글을 모르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 되기도 한다.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기 어렵고 긴 문장의 맥락을 잘 읽어내지 못한다. 그래서 춘자는 '글을 아는' 이들을, 자신보다 똑똑한 사람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훗날 자식들에게 "아빠가 남긴 돈을 다 날려먹었다"는 원망을 듣곤 하지만,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다섯 아이를 혼자 돌봐야 했던 춘자는 두렵고 외로웠다. 수도 없이 많은 이들이 그를 속였고, 그는 속아 넘어갔다.


춘자가 한글을 배우게 된 건 어느 새터민이 동네 여성들을 대상으로 연 공부방 덕분이다. 여성임에도 당시로선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그는 동네 이웃들을 모아놓고 '가나다라'부터 가르쳤다. 다들 그를 북한 사람이라 손가락질했지만, 춘자는 그가 싹싹하니 썩 마음에 들었다고 회상했다. 그가 사정이 생겨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됐을 때, 춘자는 고마운 마음에 그에게 근사한 시계를 선물했다. 당시에도 꽤나 비싼 시계였는데, 춘자는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던 자신에게 글을 선물해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그 이후 춘자의 세상은 조금 더 넓어졌다. 적어도 간판을 보고 무엇을 파는 가게인지 알 수 있었고 전단지를 보며 음식을 주문할 수 있게 됐으니까.


그러나 외국어와 외래어가 가득한, 키오스크와 스마트폰 앱이 점차 사람을 대신하는 요즘은 춘자에게 글을 모르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춘자는 다시 겁이 많아졌다. 병원에서 진료를 보는 일, 밖에서 따뜻한 차를 사 마시는 일, 편의점에서 빵 하나를 사 먹는 일 하나하나가 춘자에겐 느린 걸음으로 힘겹게 넘어야 할 거대한 산과 같다. 춘자를 가까이서 지켜보며 가장 아픈 때는 자신을 믿는 법을 잊은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을 때다. 동반자 없이는 뭐든 혼자 할 수 없게 된 그는 계속해서 기억과 함께 자신감을 잃어간다. 그의 옆에서 손주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잊지 않기 위해 글을 쓰는 것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