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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Jan 31. 2022

4. 춘자의 밥상

그리고 사랑에 빠진 딸기

설날과 한가위 때면, 춘자는 자식, 손자들을 불러 모아 밥상을 차렸다. 노릇하게 구워진 소고기, 귀한 송이버섯, 부드러운 가오리 찜, 알이 꽉 찬 꽃게 등 식탁에 오르는 요리는 매번 달랐지만, 밥그릇에 고봉처럼 쌓인 쌀밥은 변함이 없었다. 춘자는 "자고로 사람은 '밥심'으로 살아야 한다"라는 말을 자주 할 만큼 밥의 힘을 믿는 사람이었다. 그런 밥을 한가득 나눠주는 것이 춘자가 명절을 기념하는 방식이었다. 작은 집 거실이 꽉 찰만큼 많았던 손님들은 하나둘 줄었고 밥상 위에 오르는 요리들도 점차 소박해졌다. 이제 명절 손님이라고는 엄마, 아빠, 나, 동생 이렇게 네 식구가 전부가 됐음에도 춘자는 여전히 밥그릇에 밥알을 꾹꾹 눌러 담으며 복을 나눈다.


이미 예상했겠지만, 춘자의 입맛은 보수적이다. 그에게 '밥이 제일'이라는 의미는 곧 밥(한식) 이외의 다른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거 있잖아. 저번에 먹었던 거." 춘자는 자주 가는 식당에서 늘 먹던 것을 먹기를 원했고 새로운 식당에 가도 아는 이름을 고르곤 했다. 그에게 떡볶이란 오로지 신당동 떡볶이 골목에 오래도록 자리한 '마복림 할머니'의 떡볶이뿐이고, 소고기는 '마장동 우시장'에서 직접 눈으로 골라 산 것이어야만 했다. 익숙한 것이 아니면 맛이 없을 것이라 손사래를 쳤고 익히 알고 있는 식당의 맛이 변했을 때는 소중한 친구를 잃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춘자가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는 일은 그만큼 자신의 오랜 신념을 접어두고 두려움을 극복해야 하는 도전에 가까웠다.


춘자가 위기에 봉착한 건 서른 한 가지 맛의 아이스크림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과제를 마주한 순간이었다. 내가 그와 함께 밥을 먹은 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자고 제안했을 때, 평소 배앓이 때문에 찬 음식을 잘 먹지 않던 그는 웬일인지 흔쾌히 그러겠노라 말하고는 나를 앞장 세웠다. 가게 안으로 따라 들어온 춘자는 눈앞에 펼쳐진 낯선 선택지들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하며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나는 평소 춘자가 좋아하는 과일이나 요구르트를 생각하며 이것저것 메뉴들을 골랐고, 춘자는 그것들을 모두 조금씩 먹어본 뒤 가장 마음에 드는 맛 하나를 정해 연거푸 숟갈을 들었다. 춘자가 이름을 물었고, 나는 '사랑에 빠진 딸기'라 답했다. 춘자가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며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이 맛과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그에게 아이스크림은 곧 '사랑에 빠진 딸기'가 될 것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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