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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Dec 19. 2021

3. 춘자의 졸업식

졸업식에 외할머니가 오셔?

집이 가난해서, 계집애라서, 춘자는 국민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 까막눈이었던 그가 한글을 배우게 된 건 한참 뒤의 일이다. 그런 춘자에게 배움은 동경의 대상이었고 학교는 출세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춘자는 모든 손주들의 졸업식에 참석하며 평생의 한을 달래고자 했다. 춘자가 손주들과 함께 산 것도 아니고 그가 학비를 대준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손주의 졸업을 자신의 업적이라 생각했다. 춘자의 집 거실을 장식하고 있는 건 첫째 손자의 졸업식 사진이다. 그 속에서 춘자는 S대 의대 건물을 배경으로 장성한 손자의 곁에서 환히 웃고 있다. 그는 춘자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던 손자였다. 그러나 그를 포함해 각자 살기 바빴던 네 명의 손주들이 하나둘 연을 끊은 탓에, 나와 동생만이 춘자의 곁에 남게 됐다. 


셋째 딸의 첫째 딸인 나는 춘자에게 '간호사가 될 뻔했지만 제 발로 뛰쳐나온', 아쉬운 성과였다. 그에게 병원에서 일하는, '사'자 들어가는 직업인 간호사는 성공을 의미했다. 춘자는 몇 년 전까지도 그런 진로를 때려치운 나를 두고 굳이 험한 일을 택했다며 씁쓸해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 모든 졸업식 사진에는 춘자가 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춘자는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졸업식에 찾아왔고, 식이 끝난 뒤에는 꼭 자장면과 탕수육을 사줬다. 엄마가, 때로는 아빠까지 그 자리에 있었지만 계산은 언제나 춘자의 몫이었다. '밥값'을 내는 것은 춘자가 보람을 느끼는 방식이었다. 그는 만날 때마다 먹고 싶은 것을 물으며 밥을 사주려 했다. 졸업식과 같은 특별한 날에는 더더욱 그랬다. 


친구들이 모여서 맛있는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제안할 때면, 나는 약속을 저녁으로 미루며 '외할머니와 함께 중식집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친구들은 "외할머니도 졸업식에 오셔?"하고 놀라거나 "네가 외할머니랑 같이 살았던가?"라고 묻곤 했고, 나는 내심 그런 반응에 뿌듯함을 느끼면서 친구들에게 춘자를 소개했다. 기념사진도 빼놓지 않았다. 춘자와 둘이서 찍은 졸업식 사진을 보면 지금도 기분이 묘해진다. 주름이 있다 없다의 차이만 있을 뿐, 웃고 있는 춘자와 나의 입매와 턱선은 서로 꼭 닮아있다. 밝은 피부색도 엄마나 아빠가 아닌 춘자의 것을 물려받았다. 나와 닮은 그가 다른 시대 또는 다른 어딘가에서 태어났더라면, 지금과 달리 그토록 바라던 자신의 졸업식에서 졸업장을 받아 들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춘자를 마주할 때 괜스레 애틋한 기분이 드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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