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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Dec 14. 2021

2. 춘자의 옷장

멋쟁이 할머니의 옷장 비우기

춘자의 패션 철학은 뚜렷하다. 엄마에게 잔소리가 날아들 정도로 짧은 반바지도 엄마의 엄마인 춘자는 '오케이'한다. "젊어서 입을 수 있을 때 많이 입어두라"는 것이다. 그러나 춘자는 긴 머리를 풀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머리는 꼭 단정하게 '쩜메(질끈 묶어)'야 정신 사납지 않다고 당부한다. 머리만 묶는다면, 춘자는 손녀가 어떤 옷을 입고와도 뭐라 하지 않았다. 오히려 넌지시 "예쁘네?"라고 칭찬을 건네기도 했다. 반대로 내가 그의 옷을 칭찬하면 특유의 헛헛 소리를 내며 웃고는 기다렸다는 듯 어디서 어떻게 샀는지, 옷이 가진 역사를 줄줄이 늘어놓았다. 그중에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밍크코트도 있었고 춘자에겐 어떤 브랜드보다 명품이었던 닥스 바지도 있었다. 춘자가 너무 즐거운 표정이었기에, 나는 차마 그에게 동물권 보호를 위해 퍼를 입지 말라고 말할 수 없었다.


춘자는 소위 '멋쟁이 할머니'였다. 동대문 근처에 수십 년간 터를 잡고 지낸 인지 남다른 패션 감각을 자랑했다. 눈이 침침해지고 나서는 어디 창고에 박아둔  하지만, 그는 오래된 재봉틀을 가지고 직접 옷을 만들어 입던 사람이다. 그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을  입었고, 꽃무늬에 휘황찬란한 반짝이 실을  재킷까지 화려한 옷차림을 고수했다. 파는   마음에 드는 옷이 없다 싶으면 직접 원단 시장에서 천을 떼어다 단골집 전문가에게 제작을 맡기기도 했다.  옷장 서랍에 있는 근사한 몸빼 바지와 잔꽃무늬의 파자마는 모두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메이드  춘자' 또는 '메이드  동대문' 제품은 편하기도 편하거니와 소재가 워낙 좋아서 촉감과 통기성까지 훌륭해 예민한 피부에도  맞는다. 원래는 기능에 충실한 옷이었는데, 다소 촌스러웠던 디자인이 이젠 뉴트로의 시대를 맞아 아주 세련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춘자는 정말로 멋이 있었고, 나는 예나 지금이나 그의 그런 면모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토록 멋내기를 좋아했던 춘자는 요새 옷장을 비우고 있다. 딸들이나 동네 이웃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아예 버리기도 한다. 이제 새 옷을 사지 않고, 더 이상 시장에서 새 옷을 맞춰 입지도 않는다. 이유를 묻자 돌아오는 대답은 간결했다. "가져가서 뭐해." 춘자가 옷들을 가져갈 수 없는 그 목적지가 어딘지는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춘자의 어깨너머로 그가 환히 웃고 있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언뜻 증명사진처럼 보이는 그 사진은 커다랗게 인화해 액자에 넣어놓은,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찍어두었던 영정사진이었다. 춘자는 마음을 비우고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비워낸 끝에 오색 빛깔이 가득했던 옷장은 그의 두 볼처럼 핼쑥해지고 말았다. 나는 그가 조금은 무언가에 더 욕심내기를, 예전처럼 멋에 신경 쓰기를 바라며 분홍빛 스카프를 선물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한참을 기뻐하던 그는 어쩐지 그것을 목에 두르지 않았고, 다시 상자에 넣어 잘 보이지만 잘 꺼낼 수 없는 옷장 위 구석에 놓아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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