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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May 07. 2022

르세라핌, 'FEARLESS'가 환기하는 두려움

지워진 물음들에 대해

지난 2일 데뷔한 걸그룹 LE SSERAFIM(이하 르세라핌)은 'FEARLESS'에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끝내 정상에 다다르겠다는 야망을 숨기지 않는다. 두려움 없이 당당할 수 있는 까닭으로 '내 흉짐도 나의 일부라면 겁이 난 없지'라고 외친다. 흉은 상처가 아문 후에 피부에 남은 흔적이다. '나의 일부'로 체화한 '흉짐'이란 곧 이들이 외부로부터 상처를 입었음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다음 물음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르세라핌이 받은, 받고 있는 상처는 누가 남긴 것일까.


티저부터 마음껏 질주하는 뮤직비디오 속 르세라핌을 보여주기까지, 이들은 공개한 콘텐츠 중 가장 많은 시간을 '권력적 시선의 재현'에 할애한다. 카메라와 눈을 맞추고 관객을 바라보는 장면보다 카메라에 '촬영되어' 관객에게 보여지는 장면들이 훨씬 많다는 의미다. 예컨대 데뷔에 앞서 선공개된 콘셉트 포토에서 르세라핌 멤버들은 하이힐에 타이트한 미니 원피스 또는 스커트를 입고서 테니스 라켓을 이용해 포즈를 취했다. 짧은 치마, 뾰족한 하이힐은 통상적인 미의 기준을 강조해 피사체를 더욱 아름답게 보이도록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마음껏 달리거나 역동적인 움직임을 취할 수 없는 옷차림이기도 하다. 이러한 '제약'은 이들이 본질적인 목적(여기서는 테니스라는 스포츠)에서 최선의 역량을 발휘하도록 하는 데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제3자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체적이고 당당한 삶을 외치는 르세라핌을, 제3자가 오로지 아름다운 광경의 일부로서 카메라 앞에 배치시키는 모순적인 현실을 보여준다.


잔혹한 세상을 비판하는 영화가 반드시 프레임 안의 인물들에게 잔혹할 필요는 없다. 사회 비판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진짜 세상에 부재한 윤리와 배려를 지켜내야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당당한 여성들을 보여주기 위해 그들이 애써 걷어내야 할 두려움을 콘텐츠로써 재생산하는 것은 불필요한 재현이다. 'CASTING CALL(캐스팅 콜)' 영상과 이에 대한 국내 대중들의 반응이 대표적인 예다. 르세라핌 멤버들이 앞으로 힘차게 걸어 나가는 런웨이에는 대중들의 날카로운 말들이 쏟아진다. 일상에서 피부로 느끼고 있는 구조의 부당함과 그로 인한 두려움을 개인의 '용기 없음'으로 치환하고 마는 순간에 대한 위기감이다. 그럼에도 르세라핌은 'FEARLESS'에서 왜 '흉'져야만 했는가에 대한 물음과 '과거에 모두가 알고 있는 그 트러블'을 겪게 한 타자를 소거한 채, 당당하기만을 세뇌시킨다. 이에 대한 대중들의 비판은 르세라핌 멤버들을 향한 손가락질이 아니라, 이들이 전시하는 'fearless'의 특성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콘텐츠를 향한 우려의 목소리는 멤버 개개인을 향한 비난으로 왜곡되기 쉽다. 때때로 여성의 주체성을 부정하고, 몸을 평가하고, 프레임 안에 가둬버리는 양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일부 커뮤니티에서 자행된 조언을 가장한 희롱이나 모욕은 결코 합리화될 수 없다. 다만, 재현을 명목으로 권력적 시선을 행사한 자들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 두려움을 겪어내야 하는 이들만이 남아 서로 생채기를 내고 있는 상황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FEARLESS'의 '다치지 않게' 물러서야('You should get away')한다는 가사가 '너'를 향한 경고보다는 르세라핌 스스로를 위한 방어처럼 들리는 까닭이다. 르세라핌을 관음증적 앵글로 담아내고 붉은 조명이 비추는 네모난 틀 안에 세워두었다가 텅 빈 무대 위에서 오롯이 걷도록 만든 자들, 현실에 만연한 두려움을 전시하고서 화제성을 불러일으킨 자들은 'fearless'라는 단어를 내세우며 어떠한 보호도 하지 않는다. 무대 뒤에 숨어 경고할 뿐이다. 물러서지 않는다면, 지금 두려움 없이 당신의 눈앞에 선 이들이 다칠 것이라고. 이제 막 꿈을 향해 첫발을 내디딘 이들에게 다시 두려움을 안겨주고 싶은 것이냐고. 


"뭘 그렇게 보고 있어?('What you looking at?')" 'FEARLESS'의 후렴구를 구성하는 이 반복적인 물음은 그래서 대답을 요하지 않는다. 질문이라기보다는 그저 물러서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들을 향한 조소에 가깝다. 관객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가 아니라 보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이 중요한 듯하다. 이목을 끌었고, 르세라핌을 인지한 모두가 좋게든 나쁘게든 계속해서 지켜볼 것이라는 것을 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제 이들이 닿게 될 '멋진 결말'을 기다리게 됐다. 르세라핌은 두렵지 않은 세상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 두려움이 '실제로' 사라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상처를 남길 것인가. 이들의 결말이 정말 멋지기를 바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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