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선택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 그리고 기술은 어떻게 현실을?
지난 5월 21일 엔비디아의 창업자 겸 CEO 젠슨 황을 직접 만나고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단순히 업계의 슈퍼스타를 만난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을 뿐, 그 이상 그 이하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어디서 들어본 논리, 그리고 어디서 본 듯한 패턴이었다.
중국은 전 세계 AI 연구자의 50%가 있는 곳이다.
우리는 이 중국의 AI 연구자들이 엔비디아에서 구축하길 원한다
라는 발언에서는 '아 그럴 수 있지' 싶다가,
나는 최신의 새로운 형태의 AI는 미국이 주도하는 AI.
그 표준을 미국이 만들어낸 AI가 되길 원한다
라는 발언을 들으면서 나름의 확신이 생겼다. 아,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엔비디아는 상장사다. 때문에 이윤추구가 제1의 가치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가 강조한 것은 단순한 매출이 아니었다. "미국형" 기술 스택이 세계 표준이 되어야 한다는, 그야말로 기술 패권에 대한 의지였다. 물론 그는 이 자리에서 "엔비디아가 유일한 사업자는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현실을 보면 AI 가속기 시장에서 엔비디아는 없어서 못 파는 독점 수준의 사업자다. 겸손한 그의 말속에는 냉정하고 정확한 자기 인식이 있었다.
석 달하고 열흘이 지난 오늘, 김정은 국방위원장과 시진핑 주석, 푸틴 대통령이 나란히 연단을 향해 걷는 장면이 전 세계로 송출됐다. 1959년 이후 북한과 중국, 러시아 지도자가 함께 선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 순간 시곗바늘이 1991년 이전으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신냉전 시대의 서막이 오르고 있는 건 아닐까.
냉전 시대를 직접 겪어보지 못한 세대에게는 그저 역사책 속 이야기겠지만, 당시 미국 중심의 서방 진영과 소련 중심의 공산 진영은 온갖 분야에서 경쟁을 벌였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년 LA 올림픽이 서로 보이콧으로 반쪽 대회가 된 것은 이미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때의 무기가 미사일과 탱크였다면, 지금 신냉전 시대의 무기는 칩과 알고리즘이다. 바로 인공지능 AI에서 새로운 패권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석 달 전 젠슨 황의 대중국 수출 규제에 대한 주장을 종합해 보면 이렇다. 단순한 수출 규제로 오히려 중국이 독자적인 AI를 만들게 될 경우 미국은 그 기회를 상실한다는 것이었다. 마치 서방 진영의 프로토콜이 냉전 이후 글로벌 경제 질서나 정치, 국제 관계에서 핵심으로 자리 잡았듯, AI에서도 그 헤게모니를 놓지 않겠다는 의도가 역력했다.
실제로 미국의 전략은 정교했다. 지난 4월 국가 안보를 이유로 중단됐던 중국 전용 H20 칩의 수출이 8월 8일부터 다시 허용되기 시작했는데, 조건이 생겼다. 엔비디아와 AMD가 중국 내 AI 칩 매출의 15%를 미국 정부에 납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매출 분담형' 조건이었다.
미국으로썬 그야말로 절묘한 줄타기인 셈이다. 규제로 중국을 완전히 차단하면 그들은 독자적인 길로 갈 것이고, 그렇다고 무제한 허용하면 기술 유출 우려가 생긴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이런 '끈으로 묶어두기' 전략이다. 시곗바늘이 냉전 시대로 돌아갔지만, 작동 방식은 과거와 다르다.
중국의 반응은 어땠을까? 기대와 달리 폭발적인 환영보다는 조건부 수용에 가깝다. 그들도 바보가 아니다. 엔비디아의 기술력은 인정하지만, 이것이 중장기적으로는 미중 간 무역 전쟁을 넘어선 체제 경쟁, 신냉전 시대에 자신들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계산이 서 있는 듯하다. 실제로 중국 관영 매체들은 '공급망 안정과 협력'이라는 톤과 함께 '자립 역량 강화'라는 서사를 병기하고 있다.
사실 미국과 중국의 대립구도 사이에 흥미로운 움직임도 관측된다. 바로 유럽, 그것도 프랑스다. 올 6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비바 테크놀로지에서는 2023년부터 프랑스가 정책적으로 키워온 미스트랄 AI가 엔비디아와 손잡고 "미스트랄 컴퓨트"라는 소버린 AI 인프라 구축을 선언했다. 1만 8천 장 규모의 엔비디아 그레이스 블랙웰 GPU를 활용한 이 프로젝트를 통해서 말이다. 그리고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민관 참여를 독려하기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59년 전인 1966년 샤를 드골 전 대통령이 선언한 "골주의(Gaullisme ) 외교"와 절묘하게 닮아있는 모습이다. 당시 프랑스는 NATO의 통합군사프레임워크에선 탈퇴하면서도 서방과의 동맹 자체는 유지한 바 있다. 동시에 소련과는 데탕트를 모색하며 프랑스 독자 핵전력으로 자율적 억지력을 구축해 '제3의 힘' 구상을 실험했다. 서방 진영에는 남아 있으되 종속은 거부하는 독특한 균형자 전략이었다.
이처럼 AI 경쟁은 단순한 기술 경쟁을 넘어 국제 관계 질서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역사가 반복되듯 유럽, 그중 프랑스는 과거에 그랬듯 제3의 길을 모색 중이다. 다만 무조건 대립했던 과거 냉전시대와는 다른 양상이 보인다. 완전한 진영 논리 대신 '선택적 협력'이나 '조건부 자립' 같은 변수가 등장하고 있다.
새로운 기술이 사회에 뿌리내리는 이유는 기술 자체의 우수함보다는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에 있다. 몇 년 전 메타버스 광풍이 결국 ‘디지털 트윈’으로 남은 것도 다른 형태의 메타버스가 현실 문제 해결을 못했기 때문이다.
엔비디아가 휴머노이드 로봇이나 피지컬 AI에 열중하는 것도 서방 세계가 직면한 심각한 현실적 과제 때문이다. 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부족 말이다. 앞으로 20년, 30년 후에는 나이지리아나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들이 세계 GDP 상위 10위권에 진입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젊은 인구를 바탕으로 한 글로벌 사우스의 부상과 대조적으로, 미국과 유럽,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 같은 글로벌 노스는 노동력 부족이라는 구조적 약점에 직면해 있다. AI는 바로 이 약점을 보완하는 새로운 무기인 셈이다.
오늘 중국의 전승절 기념식에는 우원식 국회의장이 자리를 함께했다. 정부는 이런 파견에 대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추구하고자 하는 우리 입장이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참고로 소위 서방 국가 중에서 우리나라처럼 의전 서열 상위 인물을 보낸 국가가 이례적인 상황이다.
하지만 신냉전 시대가 본격화될수록 이런 줄타기는 더 어려워질 것이다. 우리는 정치와 군사 외에 기술 표준을 선택받을 것을 강요받을 가능성이 높다. 마치 2000년대 초반 KF-X 사업에서 프랑스 라팔이 매우 좋은 조건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F-15K를 도입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미국 선택이냐, 중국 선택이냐"라는 이분법에 갇혀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나올 법도 하다. 실제로 현재 이재명 정부는 세계 3대 AI 강국을 꿈꾸며 다양한 정책과 예산을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표어만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프랑스가 보여준 것 같은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전략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선택지들이 있을까. 자체 AI 역량을 키우되 글로벌 표준과 호환 가능한 수준을 유지하는 것. 특정 국가에 대한 절대적 의존을 피하면서도 전략적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것. 우리만의 데이터와 응용 분야에서 경쟁 우위를 찾아보는 것. 이런 것들이 드골의 '동맹 내 자율성'을 AI 시대에 맞게 재해석한 길이 될 수 있을까.
물론 쉽지 않은 길이다. 프랑스조차 미국 기업과 협력하면서도 유럽연합의 감시를 받는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지 않은가. 우리가 과연 이런 줄타기를 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시곗바늘이 1991년 이전으로 돌아간 지금, 우리 앞에는 선택의 기로가 놓여 있다. 다시 한번 누군가의 선택을 강요받을 것인가, 아니면 우리만의 길을 모색해 볼 것인가.
AI라는 새로운 무기가 지배하는 신냉전 시대에서 정답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
다만 선택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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