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평생직장 따위는 없어
직업의 선택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
단순하게 보면 일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지만 실질적으로 사회에서 내가 무슨 일을 하느냐(직업)는 나라는 사람을 대변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어떤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자격증이 필요하기도 하고 학위가 필요하기도 하고 특별한 경험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직업 하나만 보고도 그 사람의 많은 것들을 추측하고 판단한다.
취준생이었던 시절의 나 역시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명함 하나로 나를 표현할 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거기에 더해서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우위에 있는 커리어', '문과 + 비상경 + 비주류 학과를 졸업한 사람이 낼 수 있는 상위등급의 아웃풋'에 해당하는 회사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 고민의 결과가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였다. 당시 주변에서 '네카라쿠배'가 핫하게 떠오르던 시기였고, IT 회사는 뭔가 '있어 보였'고, 주변 사람들도 '한국에서 서비스 기획하려면 이 회사가 탑이지'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다 보니 그냥 이 회사를 가야 될 것만 같았다. 과거 학창 시절 타자 실기 시험에서 최하 점수를 받았을 정도로 컴퓨터와 친하지 않은 내가 (지금도 영타는 아주 느리다.) IT 서비스 기획? 진심으로?
누가 칼 들고 협박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최선을 다해서 자소서를 쓰고 과제를 하고 면접을 봐서 이 회사에 합격했다. 입사 초반에는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얻어냈다는 성취감에 만족스러웠으나 관심 분야가 아닌 업계에서 강도 높은 업무를 지속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막상 들어와서 일을 해보니 어떤 PM/서비스기획자가 되고 싶다는 목표 의식과 성장 욕구가 없었고 이직하고 싶은 회사도 없었다. 퇴사하고 대학원을 가야 하나. 자격증 공부를 해야 하나. 대학을 가지 말았어야 하나. 미국에 가서 살 걸 그랬나. 다들 적성에 맞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 텐데 나만 이렇게 힘든 건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나의 직업 선택을 후회하며 방황했다.
배부른 소리라고 욕먹을까 봐 어디 맘 놓고 얘기도 못했으나 나는 한때 지금의 회사에 온 것을 진심으로 후회했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면 회사 덕분에 재택도 하고 있고 좋은 동료들도 만났고 돈도 모을 수 있었으니 객관적으로 나쁘거나 틀린 선택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것이 뭐였을까에 대한 고민은 짧았기에 예상했던 것보다 직업 만족도는 낮았다.
창업과 취업
직업 만족도가 낮았던 이유는 또 있다. 난 어렸을 때부터 사업이 하고 싶었다. 아니 적어도 직장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예술가의 길을 가고 싶어 했고, 무용을 그만두고 나서도 오랜 기간 자영업을 해온 아빠의 영향 탓인지 나는 회사원이 되지는 않을 거다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출퇴근이 자유롭고 정장을 입지 않으며 별다른 휴가 없이 24시간 업무 모드. 승진을 걱정하기보다는 직원들 월급 주는 것을 걱정하고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아빠의 모습을 보면서 이상하게 '사업은 절대 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보다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라는 생각을 했다.
본인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남들에게 인정받으면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좋아 보이는 모습의 이면에 엄청난 우여곡절이 있음을 성장과정 내내 봐왔음에도 그의 삶을 따라 하고 싶었다.
대학교 3학년 때는 창업 동아리에 들어갔고 22살에 첫 창업에 도전했다. 외주, 인턴, 공모전 수상 경험도 없었고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면 겁이 없다는 말마따나 잃을 것이 없었던 때라 그냥 뛰어들었다.
주 6일, 보수 없이 일했고 모든 것이 처음이라 확신 없이 일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방학 때 친구들은 다 유럽여행 갔는데 나 혼자 사무실에서 광고 콘텐츠를 만들면서 '내가 지금 뭐 하는 건가'하는 생각도 많이 했다. 당시에는 힘들기만 했던 것 같은데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가장 주도적으로 일했고 순수한 성취감을 동기부여 삼아서 열심히 살았던 아주 뿌듯한 시절이다.
KPI와 로드맵을 설정하는 것도 나. 그것을 실행하는 것도 나. 목표 설정과 실행 모두를 주체적으로 행하고 달성하는 경험은 상당히 짜릿했다. (연쇄창업가들이 바로 이 포인트에서 창업에 중독된 것이 아닐까 감히 예측해 본다.)
어차피 평생직장/직업은 없어
나는 현재 8년 차 직장인이다. 20대 중후반에는 내가 회사원인 것이 싫었다. 회사원으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남들이 알아주는 회사에 입사했으니 그것으로 나의 1차 목표는 달성하였고 그다음에 내가 얻고 싶은 것을 회사에서 찾지 못했다. 퇴사하고 창업하는 지인들이 부러웠고 그중에서 일부 잘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질투도 했다. 나도 하면 잘할 수 있는데. 내가 더 잘할 수 있는데. 이런 건방진 생각도 자주 했었다.
시간이 흘러 만 30세가 된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그 계기는 다소 역설적으로 '회사원으로서' 해보고 싶은 일과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창업을 통해 이룰 수 있지 않고 내가 그렇게도 후회했던 이 회사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꿈꿔볼 수 있는 일이다.
그렇게 수년 동안 이어졌던 나의 방황은 다소 허무하게 끝이 났다. 특별히 한 것은 없다. 그냥 꾹 참고 버티다 보니 자연스럽게 새로운 길이 보였다. 이렇듯 내가 뭘 하고 싶은지는 언제 어떻게 바뀌고 새롭게 생겨날지 모르는 일이다. 당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없을 수도 있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2-3년 뒤에는 하기 싫은 일이 될 수도 있다. 극단적으로 하고 싶은 일이 급변하는 흐름에 맞추어 이 사회에서 없어질 수도 있다.
바야흐로 평생 직업과 직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이다. 멀리 보기보다는 5년 이내로 짧게 보면서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어떤 일을 할 때 즐거운지, 잘하는 것은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파악하면서 그때그때 기회를 엿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따라서 요즘은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생활하다가 문득 번뜩이는 목표와 꿈이 마음 깊이 뿌리내리면 그때 내가 모아둔 에너지를 집중적으로 쏟아붓는 것이 좋은 전략이라고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