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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니아 감상평

처음부터 끝까지 엠마스톤의 연기만 기억에 남았던 영화

by 우디코치

1. 새로운 시작을 앞둔 마지막 휴일, 사람들은 어떻게 보낼까? 나는 이직 같은 큰 변화를 앞두고 영화 한 편을 혼자 보는 나만의 '의식(ritual)'이 있다. 마치 입대할 때 들었던 노래가 평생 기억에 남는 것처럼, 그 순간의 감정과 다짐을 영화와 함께 남겨두는 것이다.


2. 지난번엔 드니 빌뇌브 감독의 <듄>이었다. 이번엔 뭘 볼까 고민했다. 결심이 서자마자 곧장 집 근처(수지 롯데몰)로 향했다. 12시 30분. 마침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과 엠마 스톤의 신작 <부고니아>가 눈에 띄었다.


3. <지구를 지켜라>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라고 했다. 장준환 감독님의 원작을 굉장히 흥미롭게 봤던 터라 기대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4. 기대가 큰 영화를 볼 때, 나는 절대로 리뷰나 줄거리를 찾아보지 않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삭발한 엠마 스톤의 광기 어린 눈빛이 담긴 포스터. 영화를 보기 위한 예열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5.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영화는 예상과 전혀 달랐다. 상당히 어둡고, 무겁고, 음울하다. <지구를 지켜라> 수준의 블랙 코미디를 기대하고 간다면 예상과 다른 농도에 당황할 수 있다. 도저히 구제 불가능해 보이는 인물들이 점점 더 파멸적인 나락으로 향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었다.


6. 영화는 상징적인 묘사를 많이 사용한다. 꿀벌의 군집 활동, 상류층과 하류층의 삶,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비처럼. 사실 원작을 이미 알기에 반전의 재미는 덜했지만, 이 영화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7. 특히 저스킨 펜트릭스의 음악이 압권이었다. 습한 기운이 감도는 90인조 현악 연주는, 자칫 평범할 수 있는 장면에 살벌한 표정을 입혔다. 영화관을 나오자마자 찝찝함을 털어내려 휴대폰을 열고 한참 동안 장면 해석을 찾아봐야 했다.


8. 이 영화는 엠마 스톤의, 엠마 스톤에 의한, 엠마 스톤을 위한 영화다. 극 중에서 삭발당하는 장면은 실제라고 한다. 한 기자가 그 소감을 묻자, 엠마 스톤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머리 미는 게 쉬웠냐고요? 면도날로 밀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어떤 헤어스타일보다 소화하기 쉬웠다."


9. 이런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녀가 보여준 광기 어린 연기는 '쉬웠다'는 말과는 정반대의 깊이를 보여준다. 그녀의 연기만으로도 이 영화를 볼 가치는 충분하다.


10. 지인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할 수 있겠냐고 물어본다면, 솔직히 "쉽지 않다"고 답할 것 같다. 이런 류의 영화를 좋아할 사람이 많지 않을, 대중적인 영화는 아니다.


11. 다만 엠마 스톤의 팬이거나 그녀의 압도적인 연기를 감상하고 싶다면 강력히 추천한다.


12.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와서, '이직 전 세리머니'로 이 영화가 과연 어땠을까? 새 출발을 앞두고 하필이면 파멸로 향하는 이들을 본 셈이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영화가 너무 어둡고 무거웠던 덕분에 내가 앞으로 마주할 변화는 아주 희망적이고 가볍게 느껴진다. 그렇게 나만의 두 번째 의식도 무사히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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