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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루스트 Jan 27. 2021

만남 04. AEIOU 아에이오우

TASTE | 프루스트의 입맛 저장소
Issue No. 1  Green



AEIOU 아에이오우 | 파우치

주인의 시선 : 넣는 물건과 그 순서에 따라 홀쭉이가 되기도, 배만 볼록 튀어나온 배불뚝이가 되기도 하는 아에이오우 파우치를 보고 있으면 개구진 초록옷을 입고 놀아달라 장난치는 강아지 같다.


에코백 깊숙이 손을 넣어 이어폰을 찾는다. 립스틱을 찾는다. 이곳저곳 뒤적이며 손을 휘저어 본다. 립밤을 찾는다. 차키를 찾는다. 볼펜이 차키의 키링에 걸려 바닥으로 떨어진다. 하루에도 수십 번, 가방 속 레이아웃은 새로고침을 반복한다. 어느 날 나는 새언니에게서 파우치를 선물 받는다. 덕분에 내 가방 속엔 없었던 ‘질서’가 만들어진다. ‘질서'란 혼란 없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게 하는 사물의 순서나 차례를 의미한다. 나는 이 작은 파우치 하나로 가방 속 원하는 물건을 수차례의 뒤적거림 없이 순조롭게 찾을 수 있게 된다.


시스템이란 이런 것이다. ‘허둥대지 않고 가방 속에서 원하는 물건을 꺼낸다.’라는 희망 목표를 세우고, 이를 도울 수 있는 장치를 심어둔 후 스스로 정한 법칙을 반복적으로 이행하는 것. 늘 가방 속에서 요리조리 돌아다니던 이어폰, 차키, 립스틱, 스틱향수의 자리를 파우치 안으로 지정해주고, 꺼낸 후엔 꼭 같은 곳에 넣는 습관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파우치 속 물건들에게 발이 달려있던 게 아니었다. 관심이 소홀했던 나에게 내려진 ‘나잡아 봐라’ 벌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습관을 들이기 시작하니 더 이상 생사를 모른 채 물건들과 생이별하게 되는 상황은 사라졌고, 그들은 항상 내가 아는 그 자리에 있었다.


이 파우치만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크기와 모양이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일반적인 파우치라 함은 직사각의 모양이었다. 단점은, 통통한 물건을 넣을 때 지퍼를 잠그기 어려울뿐더러, 직사각형의 반듯해야 할 것 같은 모양이 흐트러진다는 점이었다. 반면, 이 파우치는 아랫변보다 윗변이 길고 윗변만큼의 높이를 가진 사다리꼴 모양인데 보기와 달리 보관 면적이 넓다. 또 주로 물건을 가로로 누이는 일반 파우치와 달리 이 파우치는 필요에 따라 세울 수도 있다.


개구진 초록의 아에이오우 파우치는 내가 어떤 가방을 들고 가든, 그 모든 가방들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세트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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