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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루스트 Apr 12. 2021

나는 가끔 운다.

눈물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내 몸안에 눈물 질량 보존의 법칙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부터는, 편히 가끔 운다.


나는 자타공인 긍정적인 성향을 가졌다. 하지만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이라고 해서 우울함이 없다는 건 아니다. 같은 상황이어도 때로는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있고, 반대로 예민하게 받아들일 때가 있다. 그 표준 편차를 줄이기 위해 나는 나에게 오는 감정의 신호들을 외면하지 않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받아들이고 그 감정을 그대로 통과시키다 보면, 처음엔 감정의 특성상 드러나면 커 보이니 편차가 크게 느껴진다. 하지만 내 감정에 솔직하기 시작하면, 스스로를 속이지 않아도 되고 마음이 조금씩 더 편해지고 해소가 간간이 이루어져서인지 감정의 편차가 조금씩 작아진다.


어렸을 때 나는 우는 것은 약하다는 이상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우는 건 창피한 일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기쁨의 감정은 자랑스럽게 드러냈지만, 슬픔의 감정은 왠지 꼭꼭 숨겨두어야 할 것만 같았다.


나는 왜 눈물에 이토록 인색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러다 문득 엄마가 생각났다. 나는 엄마가 눈가에 맺힌 촉촉한 눈물이나 슬쩍 훔칠 정도의 눈물이 아닌, 똑똑 흐르는 상당량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친오빠의 예비군 훈련장 입소 때 처음으로 목격했다. 그때 나는 '엄마도 이렇게 울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하며 적잖이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 같다. 그렇다고 우리 엄마가 평소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이미지도,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도 아니었다. 


엄마뿐인가, 아빠는 더했다. 내 기억에 아빠의 우는 장면은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눈물이 자연스럽지 않은 집안에서 자라왔다. 텔레비전을 보다 슬픈 장면이 나올 때면, 나는 슬쩍 뒤로 가 조용히 눈물을 흘렸고 눈물의 흔적을 누가 볼세라 빠르게 없애기 바빴다. 엄마는 '아이참 눈물 나려 하네'라고 말하며 가만히 두면 볼을 타고 흘렀을 눈물을 눈가에서 차단시켰고, 아빠는 심지어 채널을 돌려버리라 말하고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장면을 그려보면 정말 코미디가 따로 없다. 정말 우리는 왜 그렇게 눈물에 인색했을까?


어쨌든 그 영향 때문인지 나는 아직도 누군가가 우는 걸 보는 것이 어렵다. 내게 '울음'이라는 것은, 꾹꾹 참다 더 이상 담지 못할 때 왈칵 터져 나오는 농축된 무언가였기에, 남들이 울 때 역시 같은 감정일 것이라는 걸 생각하면 쉽게 이입을 못하겠다. 남이 울면 같이 따라 우는 이들도 있지만, 나는 일단 모든 사고 회로가 멈추는 느낌이다. 내가 그것을 당장 해결해주어야 할 것 같은 지나치고 앞선 오지랖 뒤에 따라오지 못하는 능력 때문인지, 아니면 결국 내가 해결해줄 수 없다는 걸 알고 외면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저 같이 앉아 공감해주거나 어깨를 빌려주면 되는 것을, 나는 여전히 우는 사람을 달래는 것이 서툴고 어렵다.


하지만 긍정적인 것은, 운다는 것은 웃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고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이라도 깨달았다는 점이다. 사람은 누구나 바이오리듬이 저조한 구간을 지나고 사람마다 그 구간을 지날 때 해소 방법이 다르다. 그동안은 이 저조한 구간을 지날 때, 부끄럽지만 가까운 가족이나 신랑이 늘 내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어왔다. 하지만 이제는 가끔씩 눈물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왈칵 눈물을 쏟아 마이너스 감정의 분자들을 흘려보내면,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나의 감정과 스트레스를 해소시킬 수 있다. 눈물은 원래 무거운 것이었을까? 몸속에선 같은 수분이었을 텐데, 기분 탓인지 울고 나면 몸이 더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나의 감정을 인정하고 마주할 수 있게 도와준 그동안의 눈물과 앞으로의 눈물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고마워. 내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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