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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penEnded Mar 30. 2022

편견만 걷어내도 우리는 창의적일 수 있다.

일곱 살 아들에게 배운 창의성의 비밀

내 출근길에는 마치 강원도 평창에 있는 산 길처럼 도로 옆 산들을 조망하면서 차를 달릴 수 있는 구간이 있다. 그 길을 지날 때면 아래 사진처럼 산 위에 구름이 걸쳐 있는 풍경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미지 출처: 국립환경과학원 Twitter)

지금으로부터 4년 전, 당시 만 세 살이었던 아들이 이 풍경을 보고 "우와~ 산이 머리 감고 있네'라며 감탄했다. 산울림의 노래에 나오는 '산 할아버지 구름모자 썼네'라는 시적 은유까지는 아니더라도, 말을 배운 지 얼마 안 된 세 살 배기가 어찌도 그렇게 참신한 생각을 했을까 하고 아내와 나는 놀라고 내심 기뻐했었다.


아마도 아들은 당시 자기한테 가장 큰 챌린지였던 서서 샴푸로 머리감기를 딱 떠올린 듯하다. 구름이 뭔지 산에 왜 구름이 걸쳐있는지는 모르지만, 자기가 경험하고 아는 범위 내에서 보고 느끼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많은 경험과 지식에서만 창의성이 나오는 게 아닐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된 계기였다.




지난 주말, 이제는 일곱 살이 된 아들과 함께 우연히 디즈니 주니어 채널에서 "Bluey (블루이)"라는 만화를 봤다. 나중에 찾아보니 블루 힐러 (Blue Heeler)라는 호주 강아지 (Australian Cattle Dog)를 모티브로 만든 호주 TV 애니메이션 시리즈였다.

가운데 팔을 벌리고 있는 파란 강아지의 성별이 무얼까 맞춰보세요 (이미지 출처: https://www.usatoday.com)

위 사진 속의 주인공 가족을 보자마자 나와 아내는 '저 강아지 가족도 우리랑 똑같네~'라고 아이들에게 말해줬다. 우리 가족도 4명, 성별도 각각 둘씩 똑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시 후 아들이 아니라면서 저 가운데 파란색 주인공 강아지는 여자라는 거다. 아내와 내가 그럴 리가 없다며 유심히 잘 듣고 본 결과 아들 말이 맞았다! (주인공의 풀네임은 Bluey Christine Heeler로 암컷 강아지란다 (https://blueypedia.fandom.com/wiki/Bluey_Heeler).

 

우리 부부가  짓을 하며  듣고 있지 않은 탓도 있고 영어 듣기가 부족해서기도 하지만, 당연히 주인공인 파란 강아지가 수컷이라고 지레짐작해 버린 탓이 크다. 그때는  만화의 제목이 'Bluey'라는 것도 몰랐고, 'Blue Heeler'라는 강아지를 모델로 만든 것도 몰랐기에 "주인공=남자", "파란색=남자"라는 편견을 가지고 그렇게 속단해 버린 것이다. 바로 직전까지 다른 디즈니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디즈니가 다양성 (Diversity) 정말  존중하네, 디즈니가 미래네, 디즈니 주식을 사야 되네라고 실컷 떠들고 있었던 우리 부부에게  부끄러운 경험이었다.


(참고로,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Bluey는 기네스에 등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 산 호주 암컷 캐틀 독의 이름이기도 하다. (무려 29살까지 살았다고 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Bluey_(dog)). 이 만화를 만든 사람들이 그 실제 강아지를 모델로 삼았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나저나 파란색 강아지를 소녀 캐릭터의 클리셰인 머리 리본 하나 없이 첫째 딸이자 언니로 그려낸 호주 사람들은 정말 대단하다.)




만약 내 아들이 '산할아버지 구름모자 썼네'라는 가사를 이미 알고 있었더라도 '산이 머리 감고 있네'라는 새로운 표현을 쉽게 떠올렸을까? 파란색은 주로 남성을 의미한다는 걸 알고 (이것도 참 잘못된 현실이다), TV 만화들 중 대부분은 주인공이 남자라는 걸 (이건 더 잘못된 현실이다) 다른 만화들을 통해 이미 경험했다면 그렇게 즉각적으로 엄마 아빠의 말을 반박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우리는 창의성이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창의성의 원천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창의성을 높일 수 있는지에 대한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이론과 연구들이 있다. 창의력을 계발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과 도구들 역시 끊임없이 소개되고 있다. 직장인들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지식과 경험을 쌓아 그것들을 서로 연결시켜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낼 수 있을까 머리를 싸 매고, 회사는 경쟁기업보다 더 혁신적인 제품과 서비스를 더 빨리 개발해 내도록 그런 직장인들을 더 닦달하고 있다.


요즘의 창의성 교육의 트렌드가 무엇인지 회사에서 창의성 개발 교육 프로그램들이 어떤 콘텐츠를 가지고 운영되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어린 아들과의 일화들로부터 배운 큰 교훈은 '편견이 없다면 창의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창의력을 높이는 훈련 말고 고정관념과 편견을 없애는 훈련 먼저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 방법에 대해 직관적으로 알고는 있으나 이를 더 심각하게 고민해 보지 않은 게 문제인 것 같기도 하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신입사원들에게 틀에 박히지 않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기대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가 아닐까? 아직 회사의 업무관행과 조직문화의 관성에 물들지 않은 신입사원들이 일이나 사람에 대한 고정관념이 없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더 높기 때문이다. 문제는 요즘 신입사원들은 워낙 빠릿빠릿해서 회사에 금방 적응해서 금세 헌입사원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회사 부적응자가 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먼저 우리는 시간과 경험이 축적됨에 따라 어찌 보면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밖에 없는 고정관념과 편견을 인정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내가 해봤는데 그게 맞아’라며 스스로 확실하다 믿는 것들이 바로 편견의 원인이 되는 고정관념이라는 것을 순순히 인정하고, 자신이 경험한 게 전부 다가 아니라는 겸손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편견을 걷어 낼 때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창의적인 개인과 집단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참, 아들과의 일화를 통해 얻은 것이 하나 더 있다. 여전히 그 길을 따라 출근하는 나는, 산에 구름이 걸쳐진 풍경을 볼 때마다 4년 전 아들이 했던 그 귀여운 말을 기억하며 출근길의 우울함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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