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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근쥬스 Sep 01. 2023

해피버스데이

열심히 챙겨보아도 100번이 가능할까 싶은

오늘은 내 생일이다.


이런 오글거리고 낯두꺼운 멘트를 서두에 적자니 뻔뻔하기 짝이 없지만 아침에 UV와 KCM의 아련한 생일축하 신곡도 들으면서 출근했다. 미역국을 먹으라는 노래 가사를 들으면서 미역국은 산모가 먹을 일이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9월 1일은 학창 시절 생일 파티를 하기에 날짜가 참 좋았다.


1월생인 남편은 겨울 방학이고 학년이 끝나가는 시기라서, 3월 초 생일인 내 여동생은 신학기라 아직 너무나 다들 서먹해서, 7월 말 생일인 남동생은 여름 방학에는 학교를 안가는 바람에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제대로 축하를 받아본 적이 없다 했다.


물론 이들은 원래의 친구들과 생일을 즐기긴 했겠지만 9월 1일이라는 날짜만큼 딱 좋은 날도 많지 않다.  

이 날짜는 2학기 개학 후 아직은 여름방학의 여운이 남아있고 중간고사가 다가오는 것도 아니라 누군가의 생일을 핑계로 놀기 좋았다. 대학생 때는 4년 내내 개강파티와 함께 생일파티가 진행되었기에 꽤나 성대했고. 물론 학교에서 여기저기 나대고 돌아다녔던 + 내가 과대였던 탓도 있었겠지만.


게다가 9월 첫 날이라 하면 뜨겁고 치열한 여름을 보내고 난 뒤 뭔가 가을의 시작 같기도 하고(물론 여전히 기온은 뜨겁다) 올해의 진짜 하반기 시작과 같은 거창한 느낌이 든다. 8월 31일까지는 아직은 여름이고 아직은 상반기 같은 느낌이 더 크니까. 게다가 각종 관공서들도 9월 1일부로 업무 분장 및 발령 공고를 내는 경우도 많다.


1일이라는 상징성과 한 해의 중반 너머쯤 와서 어느정도 사람들과 친해진 콜라보의 날짜.

꽤나 좋지 아니한가.




이렇게나 좋은 날이지만 정말 기가막히게도 생일마다 비가 왔다. 그것도 엄청 많이.

30대 즈음까지는 거의 매 해 생일날 비가 보슬보슬 온 것도 아니고 퍼부었다. 비 안온 날짜를 세는 것이 더 빠를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심심하면 찾아오는 태풍은 덤이었다. 그 태풍들은 위력도 어마어마해서 멀쩡한 간판을 뜯어 날리는 일도 종종 있었다. 대한민국을 강타했던 역대급 태풍으로 기록되는 매미와 루사가 온 것도 이 시기 즈음이었다.


엄마는 태풍이 온다 싶으면 내 생일이 다가오는구나 하신다면서 니 성격이 원체 지랄맞아서 생일날 날씨가 이렇다고 나를 놀렸다. 그럼 8월 말부터 9월 중순이 생일인 사람들은 다 성격이 그렇다는 겁니까...?


기후 변화로 인해 요즘은 내 생일날 쨍하게 해가 나는 날이 많아져서 이걸 좋다 해야할지, 슬프다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오늘도 기가 막히게 햇살이 좋다. 내 성격이 어릴 때 보다는 좀 나아져서 요즘 날씨가 좋은건가. 하지만 올해도 여전히 북상중이라며 들려오는 태풍 소식이 있으니 아직은 지랄스러움이 남아있나 보다.




대학교 1학년 때 용돈을 벌어보겠다고 주말에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이 해의 생일이 주말이었는데 0시가 딱 되자마자 핸드폰에 불이 났다. 당시엔 카톡도 없을 때라 쏟아지는 축하 문자와 전화가 끊임없이 울려대는 것을 보고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신기해 했던 기억이 매 해 생일 때 마다 난다.   


내가 제일 먼저 축하해주고 싶어서 연락했다는 그 마음들이 마냥 고마웠다. 어리고 순수한 마음들이어서 그렇지 않았을까. 지금은 0시에 연락하는건 늦은 시간이라 핵민폐같아서 선뜻 카톡을 보내기도 어렵지만.


남편은 결혼 초에 '생일 주간'이라는 개념에 상당히 어이없어 했다.

 생일을 기점으로 전 1주일, 후 1주일을 생일 주간으로 정해놓냐고. 독재자도 그렇게 안하겠다며.

생일주간이라는 것을 딱히 만든건 아닌데 생일 전, 후로 약속들이 잦았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뭔가 남편이 이 시기에 나한테 서운한게 생기면 그냥 퉁 치는 멘트로 쓴다. "나 지금 생일 주간이잖아~ 좀 봐줘!"


왜 그리 생일에 유난을 떠냐 묻는다면 대답은 늘 한가지다.

내 생애 중 아무리 열심히 챙겨봐도 100번 챙기기 어려운 것이니까. 그리고 이미 40번이나 지나갔다.

그래서 매번 생일을 열심히 축하해 보는 것이라고.

더불어 날 낳고 키워주신 부모님 생각도 한 번 더 해본다.


생일이 뭐 그리 대수냐며 무덤덤하게 넘어가는 사람들에게는 꼭 얘기한다.

지금부터 열심히 챙겨도 6~70번밖에 안남았다니까요!!!!!


MBTI가 극 I로 바뀐 지금은 그 생일 주간을 어떻게 지내온 것인지 가물가물하다. 2,30대의 나는 아마도 인싸 재질이었던 것 같은데 결혼하고 극 I가 되어 집순이가 된 것이 신기할 뿐.


이젠 굳이 생일 주간을 즐기지 않고, 뻑적지근한 파티를 하지는 않지만 0시에 본인이 제일 먼저 축하 인사를 하고 자겠다며 졸린 눈꺼풀을 부여잡고 버티는 남편과 아침이 되기 무섭게 날아드는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의 축하 메세지 덕분에 이번 생일도 잘 보내고 있구나 싶어진다. 한편으로 누구도 내 생일을 축하해주지 않는 시간이 오면 어떡하나 싶은 우려가 들긴 하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는 생일 맞은 자의 기분을 맘껏 누려보고 싶다. 그리고 함께 생일을 맞은 사람들에게도 축하를 전하고 싶다. 더불어 생신(!!!!!!!ㅠ)축하드린다며 예쁘게 인사하던 우리 아이들... 너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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