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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Jul 20. 2020

샤프디 형제 영화는 어떤 문제인가

<굿타임> 과 <언컷젬스>, <검은 풍선>을 중심으로



어느 한 장면도 눈을 떼기 어렵지만, 기억을 되살리면 작품 전체가 도통 손에 잡히지 않는 영화가 있다. 샤프디 형제는 분명 그런 감상을 전해주는 연출자다. 주인공은 모종의 이유로 도심을 배회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미궁으로 빠지며 인물은 스스로 나락으로 향한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위해 이리 치열하게 운동하는지 자문해볼 순 있어도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는 기이한 경험과 맞닥뜨린다. 표층을 훑어볼 순 있어도 끝내 영화 속 세상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장소임을 체험하는 영화. 그것이 샤프디 형제의 세계가 아닐까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인가 묻는다면 그건 그들이 의도한 바와 다르게 영화가 하나의 문제처럼 다가온다는 개인적 감상에 근거한다. 단순한 오락으로 치부하기에 현실과 가까이 닿아 있는 장소와 얼굴들. 끝내 아무것도 해소되지 않고 끝나고 마는 미완의 서사와 잉여의 이미지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는다. 물론 여기서 샤프디 형제를 이야기할 때, <굿타임>과 <언컷젬스>, <헤븐 노우즈 왓>처럼 국내에 알려진 일부 대표작과 2편의 단편 영화만을 거론하며 글을 진행하기에 무리가 따를 수 있다는 우려가 들지만, 이들이 진행해 온 작업 사이에 유사한 형식과 질서가 있다는 믿음으로 그들 영화에 담긴 문제들을 들여다보고 싶은 유혹을 쉽게 떨치기 어렵다.



 그러니 우선 <굿타임>과 <언컷젬스>를 떠올리며 시작해보자. 두 영화가 주는 첫인상은 영화 속 인물이 투명하면서 동시에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자들이란 사실이다. 가령 ‘도망자는 도망친다.’ , ‘마약 밀수꾼은 마약을 밀수한다.’ . ‘빚쟁이는 빚을 진다.’ , ‘추격자는 추격한다.’와 같은 단언 명제들을 이어 붙인 것처럼 행동에 ‘왜’라는 질문이 결여 돼있는 인물들의 총합으로 영화들이 다가온다. <굿타임>의 코니는 무슨 이유로 돈을 훔치는가? <언컷젬스>의 하워드는 왜 빚을 갚지 않고 도박에 목을 매는가? 이들이 움직이는 데 어떤 욕망이 작용하고 있음은 투명하게 드러나지만, 당최 그 ‘어떤’이란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샤프디 형제 영화는 단편적인 인생들이 교착하여 체험의 장을 만들어낸다는 데서 일견 하스미 시게히코가 지적한 고다르적인 문제를 낳는다. (영화의 맨살, 하스미 시게히코, 2015) 이를 근거로 샤프디 형제의 영화를 복수의 인생의 단편이 동시에 만나면서 끊임없이 표정을 바꾸어 가는 영화라 조심스럽게 칭할 수 있다면 그들의 필름 위에선 곧 조우라는 주제가 중요하게 등장한다고 볼 수 있다.



조우라는 주제가 이들 영화 속에 어떻게 등장하는지 들여다보기 위해선 샤프디 형제 영화의 원형이라 빗댈 수 있는 영화를 먼저 지나쳐야 할 것이다. 2012년 연출한 단편 <검은 풍선>은 샤프디 형제 영화가 조우하는 순간에 주목할 때 어떤 유형들이 등장하는지 집약해 보여주는 작품임이 분명하다. 20여 분 분량의 이 영화에선 뉴욕 시내를 돌아다니는 존재가 배우가 아닌. 검은 풍선이란 사물의 시선을 따라 이동하기에 특별하다. 영화는 검은 풍선이 도심 주변을 유영하며 사람들을 마주치는 장면들을 담는다. 풍선과 만나는 인물들은 풍선을 그냥 지나치거나 혹은 뾰족한 물건을 들고 위협을 가하기도 하고 때론 그에게 말을 건넨다.



이 영화에 주목할 수 있다면 그건 도심을 자유롭게 활강하는 풍선에 볼 수 있는 유려한 움직임과 검은 풍선이 배우들과 조우하는 순간, 풍선을 앞에 두고 배우가 자기 고백을 시작한다는 데 있다. 독백을 시작하는 인물은 자신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고백하기도 하고 풍선을 데리고 시내 이곳저곳을 누빈다. 이때 검은 풍선은 뉴욕이란 대도시를 탐색하며 도심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들 얼굴에 깃든 고독과 일상을 기록하는 카메라의 역할을 대신한다.



동시에 영화 속 검은 풍선은 마치 인격을 지닌 존재처럼 보인다. 첫 시퀀스에 검은 풍선은 쓰레기장에 버려져 소각될 운명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영화는 검은 풍선이 쓰레기 틈 사이로 홀로 떠올라 다시 도시로 향하는 광경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린 그에게 생의 의지와 같은 감정을 이입할 여지를 갖는다. 영화가 풍선을 하나의 의지를 지닌 존재로 묘사하는 과정은 이후 시퀀스에 그를 마치 배우처럼 받아들이는 효과를 낳는다. 검은 풍선이 선글라스를 쓴 남성과 함께 옷 가게에 들어가 옷을 훔치는 에피소드를 예로 들 수 있다. 여기서 검은 풍선은 남자의 요청대로 보안 카메라를 절묘하게 가리는 데 성공한다. 어설픈 첩보 영화처럼 보이는 이 순간은 마치 <검은 풍선>이란 영화 속 한 편의 버디 무비가 성립하도록 한다. 게다가 마지막 시퀀스에 검은 풍선이 트럭 창문을 깨뜨리며 차 안에 갇힌 다른 풍선들을 창밖으로 탈출하게끔 연출한 장면은 어처구니없는 풍경을 목격하는 데서 오는 의구심과 함께 묘한 감동이 공존하기 때문에 특별하다.




이 감동을 단순히 샤프디 형제 영화 속 수면 아래 존재하던 전복적인 성격으로만 치부해선 안 될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할 수 있는 순간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운동의 힘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이는 목적 없이 움직이는 줄만 알았던 풍선이란 사물이 뉴욕이란 대도시를 이동하며 그가 누구와 마주치는지에 따라 이전과 전혀 다른 맥락으로 영화가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음을 체감함으로써 느끼는 자력이다.



예를 더 들어보자. <언컷젬스>의 하워드가 경매에 오팔 가격을 부풀리려는 시도가 무산되고 난 뒤, 그는 아르노의 수하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또다시 빚을 진다. 하워드가 절망에 빠져 있을 무렵 그에게 걸려오는 케빈 가넷의 전화 한 통은 절망에 빠져 있던 하워드에게 새로운 길이 주어지는 셈이다. <굿 타임>의 코니 역시 마찬가지다. 닉이 아닌 레이와 마주하고 난 뒤 모든 계획이 틀어져 버린 그가 놀이공원에 숨겨진 마약에 대한 얘기를 듣고 곧바로 놀이공원으로 향하는 장면을 기억해보자.



물론 여기서 그런데도 두 인물의 운명이 결과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지 않냐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가능성을 소진했다고 여기는 순간, 작은 희망이 보이자 주저 없이 바로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운동은 전체 서사와 상관없이 그 순간이 지니는 전환의 힘을 목격하는 것이기에 중요하다. 이런 이유로 다소 거칠게 샤프디 형제의 영화 세계를 주장할 수 있다면 그건 조우를 목격하는 것과 다름없으면서 곧 단편적인 삶들이 만나 영화 속의 영화, 혹은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고 체험하는 일이라 하겠다.



이 가능성이 피어나는 장소를 샤프디 형제는 본인들이 살아온 뉴욕의 뒷골목으로 삼았다. 현실에 존재하는 장소를 세트처럼 활용하는 방식은 비토리오 데시카의 <자전거 도둑>과 같이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이 보여준 차원에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진 접근은 아니다. 현실, 혹은 그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이미지들이 실시간으로 창조하는 한 편의 영화는 관객이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무의식을 내면으로부터 건져 올린다.



달리 말한다면 카메라 렌즈에 비친 한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고민하도록 한다는 데 의의가 있을 것이다. 이는 앞서 이야기한 가능성이란 주제가 영화 밖, 즉 관객이 위치한 장소와의 연결고리를 갖는다는데 이들의 영화가 바깥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시도를 감행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런 이유로 카메라를 비롯한 어떤 매개를 거쳐 화면 속 세계나 피사체를 바라보는 행위가 샤프디 형제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이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굿타임>의 닉과 코니가 바라보는 텔레비전 화면, <언컷젬스>에 등장하는 CCTV 화면과 스포츠 중계, 그리고 하워드가 케빈 가넷을 설득하기 위해 휴대폰으로 오팔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는 장면을 비롯해 <존스 곤>과 <굿 타임>에 출입문 도어 뷰에 담긴 피사체 이미지는 카메라의 관음성 있는 성격을 드러내면서 감상자가 영화라는 매체를 감각하기 위한 하나의 주술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샤프디 형제는 이 주문으로 우리에게 어떤 문제를 던지는가. 한 가지 가정이 가능하다면 그건 관객이 끝내 통증을 느낄 수 없음을 인지하도록 하는 시도라 우선 여길 수 있다. <굿타임>의 닉이 텔레비전 화면을 두고 다른 수감자와 다투는 순간으로 이동해보자. 닉은 비니 모자를 쓴 사내와 다투던 중에 다른 수감자에게 무차별한 공격을 받는다. 여기서 영화는 주먹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가는 닉의 얼굴을 클로즈업해 바라본다. 리버스 숏으로 가격하는 사내의 얼굴이 잠시 등장하고 환호하는 군중들과 만신창이가 된 닉의 얼굴이 번갈아 나타난다.



여기서 폭력은 영화 안과 밖에 하나의 구경거리로 등장한다. 쇼트는 빠르게 뒤바뀜과 동시에 주먹이 닉의 얼굴에 부딪히며 들리는 마찰음과 군중들의 환호 소리, 사이키델릭 음악과 오프닝 자막의 출현은 지금 눈앞에 있는 폭력이 하나의 오락임을 일러주는 단서다. 동시에 이 편집은 <굿타임>이란 영화에 속도감과 공포를 전해줌과 동시에 관객과 영화 사이에 존재하는 벽이 있음을 깨닫게 한다. 그건 닉이 감각하는 통증이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가 체감할 수 없다는 무통의 감각이다. 누구보다 가깝게 위치해 화면을 바라보는 관객이 영화가 제시하는 폭력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자리에 위치한다는 아이러니다.



이 아이러니를 <굿타임>은 한 번 더 반복한다는 데 주목하고 싶다. 코니가 크리스탈의 집에 잠시 머물렀을 때 그는 TV 화면에 칼을 든 여성의 일화를 다룬 르포 다큐멘터리를 본다. 여기서 화면 속 여성은 경찰과 대치하던 중에 자신이 들고 있던 칼에 찔리는 불상사를 당한다. 샤프디 형제는 여성이 자신이 들고 있던 칼에 찔렸다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강조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가 겪는 통증에 주목하지 않고 칼에 찔린 부위만을 비추는 지점에 머무른다. 영화 속 폭력이 하나의 구경거리로 비치고 있음을 관객이 깨닫게 함으로써 관객의 자리란 곧 통증을 느낄 수 없는 위치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 표현은 인물에 온전히 이입할 수 없는 괴리를 낳는다.



물론 영화가 폭력 이미지와 조우하며 영화와 감상자 간의 거리가 생기는 형식이 비단 샤프디 형제에게만 해당하는 바는 아닐 것이다. 다만 그 맥락을 인지하고 좀 더 들어가보고 싶다. 앞서 예시로 들었던 장면을 한번 더 상기해보자. 크리스탈과 함께 TV를 보던 코니는 자신의 범죄 행각이 뉴스 화면에 등장하는 것을 목격하고 이를 모면하기 위해 크리스탈과 키스를 한다. 분홍빛 조명 가득한 방으로 이동한 두 사람은 레이가 깨어남을 인지하고 이내 당황한다. 중요한 건 바로 다음 장면. 코니가 레이와 대치하는 상황으로 그가 데려온 환자가 닉이 아닌 레이임을 깨닫는 순간이다.



여기서 레이는 한 손에 깨진 유리조각을 들고 코니와 대치한다. 앞서 칼에 찔린 여인이 등장한 다큐멘터리와 유사한 상황이 이번엔 코니의 눈앞에 발생한 것이다. 이는 화면 안에서만 벌어지는 줄만 알았던 내러티브가 영화 속의 화면 바깥에서도 그대로 코니 앞에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코니는 화면 안에서만 벌어지는 거라 믿었던 이야기들이 현실로 침투하는 상황을 목격하는 셈이다.



이는 단순히 코니가 존재하는 영화와 그가 목격한 화면 속 이야기 뿐 아니라, 영화가 관객이 존재하는 현실과 접점을 이루려는 시도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샤프디 형제가 영화 안과 밖을 능수 능란하게 연결하는 시도는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징후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때때로 과감하게 현실에 존재하는 실존 인물을 영화 속에 데려와 비전문배우로 활용한다. <언컷젬스>의 농구선수 케빈 가넷과 가수 위켄즈는 물론 <헤븐 노우즈 왓>에선 실제 홈리스 출신인 아리엘 홈스가 주인공 할리를 맡은 것이 그 예다. 이들이 기용된 이유를 쉽게 단언할 순 없지만 <언컷젬스>의 한해선 앙드레 바쟁이 이야기한 비전문 배우인 케빈 가넷과 위켄즈가 전문 배우인 아담 샌들러와 호흡을 맞추며 최소한의 극적 허구를 허용하는 영화에 진정성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는 셈이라 말이다 (영화란 무엇인가? 4 사실성의 미학:네오리얼리즘 , 앙드레 바쟁 , 2018)



이 두 연기자 유형 사이에 유기적인 호흡이 가져다 주는 효과는 전문 배우가 비전문배우처럼 느껴지도록 하는 감상을 던져준다. 스타 배우인 로버트 패틴슨과 아담 샌들러는 그들이 연기해 온 배역과 전혀 다른 얼굴과 연기를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갖고 있던 환상이나 이미지를 지운다. 비 전문배우들은 전문 배우와의 호흡으로 극적 몰입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기회를 받고 반대로 전문 배우들은 그로 인해 그 장소에 가장 어울리는 얼굴로 나타난다. 이 얼굴들의 교차가 앞서 이야기한 현실과 영화 속 세계의 유기적인 호흡을 가능케 한다. 결국 샤프디 형제 영화는 배우와 장소, 그리고 그들이 지속적으로 교감하며 만드는 조우의 영화이자 관객의 자리를 의심하게끔 하는 힘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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