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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Jun 22. 2020

그는 왜 여기서 살기로 결심했나

<사라진 시간>을 보며 떠오른 질문


 정진영의 <사라진 시간>을 보기 전부터 이 영화를 둘러싼 소문들을 여럿 접했다. 걸작으로 평가하는 이들은 데이빗 린치나 홍상수의 이름을 거론했고, 졸작이라 이야기한 사람들은 확실하게 매듭짓지 못한 내러티브를 근거로 비난했다. 영화를 본 뒤의 감상을 이야기하자면, 확실하게 <사라진 시간>을 지지하거나 따분하다고만 여기기엔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불현득 들었다. 나는 다만 한 인터뷰에 감독 정진영이 스스로 불자라고 밝힌 지점을 읽으면서 이 영화를 조금 더 흥미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영화를 보며 홍상수의 <북촌방향>을 떠올려 본 계기는 김병규 평론가가 아즈마 히로키의 게임적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쓴 <북촌방향>에관한 비평에 있었다. 퀘스트를 받고 플레이어가 된 자가 같은 장소와 시간에 반복해서 등장하고 그가 곧 게임 속 세계에 갇혀있음을 인지하는 오류의 영화. 이를 <사라진 시간>에 가져온다면 술에 취한 형구가 불에 탄 교사 부부의 집에 들어간 뒤, "도대체 그날 당신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라며 소리치자, 형구의 눈 앞에 다시 교사 부부가 등장하고 "우리는 지내는 동안 행복했어요"란 서늘한 응답을 던진 이후에 형구는 갑작스레 죽은 남교사의 몸으로 바꿔치기 되고, 그는 정해균이란 인물을 죽이는 데 실패하며 그가 지금 존재하는 세계에 갇혀있음을 인지하게 된다. 물론 인용한 김병규의 비평이 분석한 바와 같이, 게임적 리얼리즘이란 개념을 <사라진 시간>에 그대로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생각이 들지만 세계의 관찰자로 존재하던 이가 직접 플레이어가 되는 방식, 다시 말해 취조를 하고 있던 형구가 직접 교사 부부의 삶이 되는 식의 전환을 보며 아마 이 대목에서 <사라진 시간>을 일종의 게임으로 인식했던 것 같다.  


 

 https://ppss.kr/archives/27874


 다만 영화를 보며 들었던 의문은 하나다. 그건 형구가 왜 이 세계에 적응하기로 결심했을까 이다. 그의 선택지에 자살은 왜 없었을까. 왜 그는 타살은 행동으로 옮기는 반면에 자살은 실행하지 않았는 지가 궁금하다. 돌이켜 보면 형구가 옮겨간 세계엔 인간의 죽음이 없다. 화재로 사망한 교사 부부가 온천에 다시 등장하는가 하면, 형구가 태워 죽인 정해균은 고라니의 시체로 바뀐다. 그가 탐색을 종료하는 시점도 두 번째 세계 속에 관객이 궁금해하던 인물들의 안위가 모두 공개된순간과 동시에 이뤄진다는 점에 의아하다. 한 가지 가설이 가능하다면, 형구가 이 세계에 살아있는 상태로 머물기로 결심한 까닭은, 그가 넘어온 세계엔 아픈 사람이 없으므로 그것만으로 괜찮다고 여긴게 아닐까 하다. 요컨대 <사라진 시간>의 실마리는 두 세계 중 어느 세계가 진짜인지를 판별하거나 실제와 꿈을 판별하기 위해 이리저리 해석게임을  늘어놓기 보단, 왜 그가 옮겨간 세상에 죽음이 없는지를 들여다 보는게 더 오히려 <사라진 시간>을 이해하기 위한 통로 같다. 물론 아직까진 불교의 윤회라는 키워드에만 영화를 가둬놓고 인식하기엔 그곳에 포섭되지 않는 잉여들이 여전히 영화에 남아있다고 느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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