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끝까지> 구로사와 기요시 단상
<해안가로의 여행>부터 <은판 위의 여인>, 두 편의 <산책하는 침략자>와 <지구의 끝까지>까지 근래의 구로사와 기요시가 다루는 주제는 사랑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사랑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기요시가 무작정 사랑이 답이다란 영화를 만들어온 건 아닌 것 같다. <전조 산책하는 침략자>에 사랑을 에너지로 삼아 도피한 두 사람이 마침내 당도한 장소가 바다이며 이곳을 응시할 때, 여기서 바다는 세계의 바깥이나 가능성을 내포하는 공간이라기 보다 도주의 불가능을 암시하는 장소처럼 다가오는가 하면, <은판위의 여인>과 <해안가로의 여행>에선 여정의 끝에 사랑하는 대상이 소멸하는 과정을 끝내 보여주기에 오히려 사랑을 동력으로 삼아 무작정 달려온 시간 이후를 질문하는 감독이라 봄이 맞아 보인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동일본 대지진이란 동시대의 사건을 구체적으로 언급함으로써 대지진 이후의 사랑을 어떻게 지속할 것인가를 묻는다는 점에 차이가 있어 보인다) 사랑을 질문하는 근래 기요시 영화들에 볼 수 있는 특징이 하나 더 있다면, 그건 여정의 시작이 있지만 <절규>나 <도쿄 소나타>에서 처럼 귀환은 부재한다는 사실이 아닐까하다.
다소 이례적이게 <지구의 끝까지>에서도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를 무의식 중에 인지하는 장면이 하나 등장하는데, TV로 도쿄에 일어난 화재를 본 요코가 핵발전소가 터졌다고 지레짐작하는 순간이다. 홀로 우즈벡을 여행하던 요코의 산책은 사랑하는 대상과 세계의 답신이 울리지 않는 무응답의 여정이 다름 아니다. 그 울리지 않는 응답이 이 영화에 낯선 장소를 이동하는 듯한 감각에 활기를 더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엔딩 시퀀스는 더욱 의문으로 남는다. 광활한 자연 풍광과 함께 에디뜨 삐아쁘의 사랑의 찬가가 울려퍼지는 무한 긍정의 쇼트. 아무일도 벌어지지 않았기에 안심하라는 세계의 응답인가. 아니면 이 또한 세계의 끝에 당도 한 걸 알면서도 끝내 외면하려는 하나의 도피인가. 일본으로 끝내 돌아가지 않는 장면이 등장하는 이유는 그래서인가. 하반기엔 기요시의 사랑 영화를 정리하는 시간을 좀 가져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