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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Aug 06. 2020

모하비 짱

<반도> 2020

좌 <군함도> 우 <사냥의 시간>


 나름의 작가적 야심을 지닌 감독으로 평가 받던 이들이 거대 자본을 등에 업자 그들의 영화가 낯선 장소로 이행하는 광경은 이제 익숙한 풍경이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남자들의 싸움판을 찍던 류승완이 난데없이 징용 노동자들의 역사가 담긴 군함도란 시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때, <파수꾼>에 남고와 인천이라는 공간에 벌어지는 소년들의 위태로움을 탐구하던 윤성현이 돌연 미래시대 한국이란 평행세계로 우리를 데려갔을 때, 이들은 본인의 상업적 역량이 마치 규모의 확장이나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축조하는 것에 달려있기라도 하듯 집중했다. 동시에 이들의 영화는 대중으로부터 조롱 당하거나 헐리우드 영화의 레퍼런스를 참조했다는 비난과 마주하곤 했다. 가령 <군함도>는 그 주제와 액션이라는 측면에서 타란티노의 <바스터즈:거친 녀석들>로 <사냥의 시간>이 먼지 섞인 주홍빛 도시를 부감으로 바라보는 지점에선 <블레이드러너 2049>에 비교되곤 곧장 웃음거리가 된 것처럼.



 물론 이들 영화가 환대 받지 못한 이유를 레퍼런스의 차용과 이에 대한 반감으로만 치부하는 건 단순한 도식에 그칠지 모른다. 그보단 김병규 평론가가 필로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사냥의 시간>의 예를 들어보면, 동대문 지하상가 근처로 보이는 공간을 대뜸 디스토피아적 장소로 재정의하는 지점이나, 학교란 곳에서 벌어지는 사춘기 소년들의 욕설과 과도한 제스쳐가 고등학교란 특수한 공간에서만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었던 사실을 외면한 채로 윤성현이 30대 배우들에게 똑같은 소년 연기를 요구할 때 괴이한 거리감이 탄생했던 걸 근거로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들 영화가 우리를 데려간 곳이 도무지 ‘영화적 공간’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부정교합으로 다가온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곳 한국을 전혀 다른 시공간으로 탈바꿈하려는 시도들은 대게 공간과 합치되지 않는 배우의 감정과잉과 수사들, 그리고 풍경을 잃고 이름만 달랑 남은 지역들이 만들어내는 총체적인 사유의 부재라 할 수 있다. 서울과 부산이란 지역을 명명하는데 그치고 KTX 역사 플랫폼을 제외하곤 지면에 발을 딛지 않은 <부산행>은 좀비가 창궐한 시간대가 바로 현재라는 점과, 열차 안의 인물들이 기차와 기차역을 제외하곤 그 어떤 바깥도 들여다볼 수 없었던 폐쇄성에 기인한 나름 성공적인 장르영화였을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만약 <반도>가 오프닝 시퀀스의 함선에서만 벌어진 이야기로 극을 이끌었더라면, 전작의 명맥을 잇는 데 성공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허나 그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한 함선은 단순히 전작에 가해진 비난이 주가 되었던 공유의 죽음,(가족 간의 비극적 정서를 극대화 하는 슬로우모션) 반복하는 데 그친다. 즉 신파극이란 비난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연상호의 영화적 제스쳐로만 활용이 되는 모습에 이 영화에 관한 기대를 접었던 것 같다. <반도>는 그런 이유로 배가 어떻게 홍콩에 정박했는지, UN헬리콥터가 어떻게 인천항에 당도했는지와 같은 당위가 필요한 이야기들마저 설명을 포기한다. 그런 이유에서 연상호의 <반도>는 또한 영화적 장소를 이행하는 데 실패한 또 하나의 연장선이자 기아차 모하비의 훌륭한 내구도를 설명하기 위한 광고 영화에 그쳐 보이는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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