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조일남 Mar 19. 2022

소피의 세계 2021

이제한 감독 작품




‘내레이션’이란 기능은 이상하다. 그것은 언제나 과거의 어떤 시점에 녹음한 목소리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는 화면 속에 타자로 현존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시제를 교란하는 장치다. 한 번 더 말하자면, 화면 속 목소리는 과거의 어느 시점을 전제로 이야기 하고 있지만, 화자는 바로 지금 이 화면을 보고 있는 관 객을 대상으로 현존하고 있다는 점에 사뭇 모순적이라 할 수 있다. 과거의 어떤 대상이(물리적이건 그렇지 않 건 상관 없이) 현존 했음 증명하는 역할이 내레이션의 기능 중 하나라면, 이는 내레이션 또한 사진의 역할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사진과 내레이션을 활용하는 <소피의 세계>같은 영화를 볼 때면 이 영화가 여러모로 사진적인 영화로 받아들여진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진 뿐 아니라, 노골적으로 담아낸 홍상수 영화 속 장면들(여기서 노골적이란 표현은 화면 구도와 카메라 전환 속도를 비롯해 장면 자체를 그대로 옮겨오는 시도를 뜻한다), 내레이션으로 구술하는 인물 사이의 맥락을 고려해보고자 한다면, <소피의 세계>는 연출자가 자기가 바라본 세계(홍상수 영화 속에 등장한 이미지)를 오롯이 옮겨오기 위해 노력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세계를 찍는다는 표현은 메론판다님께서 번역해주신 구로사와 기요시의 "나의 영화론"에 쓰인 의미를 참고 했다.


https://blog.naver.com/porkpitch/222405796419


나의 영화론              

저는 이 "세계"라는 단어를 좋아해서, 영화에 대해서 뭔가 이야기하거나 쓰거나 할 때 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자주 써버립니다만, 이 단어에 딱히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당신은 영화로 무엇을 그리고 있는가?" 라고 누군가 물을 때, 곤란해서 즉시 "세계" 라고 대답해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영화로 그리고자 하는 것은 잔뜩 있습니다. 우선 "이 야기"라는 것을 말할 수 있겠지만, 물론 그것 뿐만은 아닙니다. 도쿄의 거리라든가 배우의 얼굴도 그리고 싶습니다. 90분이라든가 100분이라는 시간을 그리고 싶다고 말하는 방법 도 가능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들 전부를 통합해서, 영화라는 미디어는 기본적으로 " 세계"를 그리기 위한 기술인 것이다, 라는 것이 아무래도 제게 있어선 곧바로 다가오는 듯 합니다. 그렇다 해도 거창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영화 카메라라는 기계는, 하얀 캠버스 에 그림을 그리거나, 공책에 문자를 쓰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목적으로 사용됩니다. 즉, 카 메라의 목적은 단 하나, 잘라내는 것입니다. 눈 앞의 사물로부터 발하는 빛을, 그저 물리적 으로 사각형으로 잘라낸다, 그것이 카메라의 유일한 기능이라고 말해도 좋겠죠. 그리고, 이런 카메라의 물리적인 기능 앞에서는, 사람도 거리도 산도 바다도 전부 평등합니 다. 어느 것이든, 있는 그대로 거기에 있는, 즉 그것은 "세계"가 아니겠습니까. 카메라가 사 각형으로 잘라내고 있는 것, 그것은 문자 그대로 "세계" 이외의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고 말 할 수 있는게 아닐까요. 그래서 카메라는 대단하다, 라고 말하고 싶은게 아닙니다. 카메라는 단순히 그것을 위해 전개되는 기계라는 것입니다. 펜도 그림 도구도 아닙니다. 물론 애니메 이션도 아닙니다. 그저 세계를 잘라내는 것 뿐, 그런 도구는 아마도 카메라밖에 없을 겁니다.

나의 영화론 21세기의 영화를 말하다 / 글번역 메론판다 님



 유운성이 말한 적 있던가, '영화는 내가 본 것을 남에게 소개한다' 라는 말을 머리 속에 꽤나 오래 되새김질 해왔던 것 같다. 나는 그 말이 기요시가 말하는 세계, 즉 자신이 본 있는 그대로의 이미지를 카메라로 잘라내어 내가 모르는 누군가에게 보여줄 때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소피의 세계>는 그러한 예를 보여주는 적확한 작품이다. 그런 의미로 이 영화의 미덕에 정직함을 추가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군가는 홍상수 감독 영화 속에 등장한 여러 장면들을(심지어 배우들 조차) 그대로 옮겨 놓은 영화라 비아냥 할 수 있겠지만, 글쎄. 이 영화를 만들기까지 이제한 감독이 지나온 배경을 들여다본다면 이 영화의 장소(북촌), 배우(김새벽,신석호,서영화)가 등장하는 건 더할나위 없이 자연스러운 결론 이라는 생각이 든다.


<홍상수 영화를 찍기로 했다> 라는 작품을 떠올려 보자. 이 영화는 우리가 홍상수의 영화를 떠올렸을 때 받는 그 인상을 그대로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하는 자의식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영화다. 술을 마시면 갑작스럽게 솔직해지고(혹은 불쾌함과 솔직함을 구별 못하고) 농담을 주고 받는 남녀와 말 그대로 ‘홍상수 영화의 느낌’을 내기 위해 작위적으로 구성된 대사들 (그 대사들은 주고받는 배우와 배우 사이에 성립하는 것이 아닌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에게 닿기 위해 있는 힘껏 똥꼬쇼를 하는 ...이라 말하고 싶음),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 김민희가 술을 마시던 도중 테이블에 앉은 모두에게 "자격 없다" 라며 일갈하는 1분 단편을 보고 예술계 종사자와 홍상수 영화를 판단하는 모습처럼 어떤 인상만을 편취해서 만들어낸 '홍상수 영화 같은(like) '영화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소피의 영화>는 앞의 <홍상수 영화를 찍기로 했다>와 비교했을 때 전면적으로 홍상수 영화 속 이미지와 오브제를 적극적으로 차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작위적인 구성이 오히려 하나의 정직함(정직함이라면 이제한이라는 사람이 지나온 궤적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기술실장으로 홍상수와 10편의 영화를 찍어왔다.)으로 다가왔다. 조금 더 들여다 본다면, <소피의 세계>는 근래의 홍상수가 만들어 낸 영화들이 품었던 질문, 이를테면 두 사람이 대화하는 방식을 어떻게 찍을 것인가. 하나의 실재하는 장소에서 영화적 공간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또 인물들은 그 공간을 교차하는가와 같은 질문들, 그러한 효과들을 생성하기 위해 배치되었던 장면들을 무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반복하고 있다. <도망친 여자>의 포스터가 되었던 북촌 길을 걷는 모습이나, 창문 프레임으로 보이는 인왕산의 풍경, 벤치에 앉은 인물의 구도와 마주보는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찍을 때 카메라가 좌우로 움직이는 등, 형식을 그대로 옮겨온 셈이다.(홍상수 영화를 대부분 본 사람끼리 이 영화를 본다면 곧 웃음 참기 챌린지가 된다)


말하자면 홍상수 영화들 속에 몇 몇 장면을 패스티쉬하여 모아 놓은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제한 감독 본인이 홍상수 감독을 너무 의식해 서 찍었을 거란 우려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점에 있어서 이 영화가 무척 솔직하고 대범한 영화처럼 보인다. 오늘 확인해보니 <소피의 영화>를 찍기까지 10 편의 홍상수 영화에 스태프로 참여했더라 10 편의 영화를 함께 찍는 동안 있는 그대로 자기 영화로 옮겨오기라는 것은 쉬운 일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스반 산트는 그럼 왜 <싸이코>를 찍었을까? 누군가의 영향 아래에 있음을 고백하지 않고, 자기 이야기를 오롯이 하기란 쉬운 일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