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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리 Jun 15. 2024

잘하는 것만 잘하려는 괘씸함

   그건 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과 등을 맞대고 있는 마음일 것이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같을지도 모른다. 그 마음이 열등한지, 추악한지 그런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이런 버릇 자체가 맛있는 것만 먹으려는 편식과 다르지 않다.




   대화를 즐기진 않지만 가장 듣기 좋은 말은 역시

   “우와, 진짜 잘한다.”

   같은 말들. 나의 능력을 칭찬하는 말. 누가 그런 말을 해줄 땐, 아무리 싫은 사람이라도 얼굴을 마주 보고 웃고 싶어 진다. 전에 없던 밝은 표정을 지어가며. 진심을 다해. 멋있다, 예쁘다, 옷 잘 어울린다, 이런 칭찬보다도 뭔가를 잘한다는 말을 들을 때 심장이 반응한다. 말을 잘한다, 운동을 잘한다, 집중을 잘한다…… 그런 말을 들으면 자기 직전까지 그 말을 듣던 순간을 되풀이한다.


   문제는 반대편에 있다. 잘못하는 거, 아무리 해도 재능이 없는 분야, 이런 것들은 어느 순간부터 쳐다보지도 않는다. 대표적으로 요리. 요리는 하면서도 지치고 스트레스받는 일이지만, 그걸 먹었을 때의 스트레스가 훨씬 심한 분야이다. 그다음이 악기 연주. 작고 또 짧은 손가락으로 잘 연주할 수 있는 악기는 많지 않다. 그런 건 아무리 해도 잘한다는 칭찬을 받을 수 없다. 물론 모든 일을 칭찬받기 위해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왕 하는 거 열심히 한 끝에 잘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지 않나.


   요리와 악기는 버려두고 새로운 잘할 수 있는 걸 탐색했다. 인생은 점점 무료해져 가고, 이제는 손끝에 닿는 화려한 세상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손가락을 휙휙 한 번, 두 번 넘길 때마다 웃음이 끊임없이 터져 나오곤 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무표정으로 응시하고 있다. 다른 게 필요해, 좀 더 고급스럽게 시간을 때우는 방법을 배울 차례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손가락을 옮겨 체스판 위의 기물들에 가져가기 시작했다.


   체스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아직 초급 티를 벗지 못한 내가 봐도 얼마나 무궁무진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룩, 나이트, 비숍, 퀸, 킹 그리고 폰. 그런 기물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에서부터 행마법을 익히는 것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여전히 나이트를 옮기는 건 어렵다. 거기에 캐슬링이나 앙파상같은 특수규칙은 여전히 난해하고, 여러 오프닝을 익히는 건 아직 상상도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때의 기쁨은 말할 것이 없다. 그래 봤자 초보끼리의 대결이지만, 초보를 상대로 한 승리에도 말로는 다 못할 기쁨이 담겨 있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잘한다는 이 유능감, 승리로 쌓아가는 이 성공 경험.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성취감을 채워주는 중요한 요소이지 않나. 나는 줄곧 이런 것들이 필요했다. 내 존재의 증명. 나는 이걸 탁월함에서 찾는 편이다.     




   여전히 체스를 잘 모르지만 가장 하기 좋은 말은 역시

 “체크메이트!”

 그런 후 속절없이 넘어가는 킹을 바라보며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그 모습을 찍어둔다. 내가 이긴 판, 사진첩 속에 전용 앨범도 만들었다. 그 후 며칠을 체스에 빠져 지냈다. 정확히는 내가 넘을 수 없는 벽을 느끼기 전까지. 내가 기껏해야 두 수 앞을 바라볼 때 다섯 수 앞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는 걸 만나기 전까지만. 모래성처럼 쌓았던 유능감이 무너져 흐를 때까지만.


   집으로 돌아와 집 한편에 짐짝처럼 자리하고 있는 피아노를 바라봤다. 피아노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그만뒀다. 내 짧은 손가락으로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걸 인지한 순간 피아노 연습을 포기했다. 어차피 최고가 될 수 없으니까. 어차피 이런 피아노 같은 거,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지천에 깔리고 널렸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던 게 아닐까? 그 과정에서 재미를 느끼고, 잘하지 못하더라도 꾸준히 했더라면 지금쯤 류이치 사카모토의 어느 연주곡을 치면서 행복감을 느꼈을지 모를 일이다. 내가 유능감에 미쳐서 많은 것들을 놓쳤구나. 남들보다 잘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구나. 전의 나보다 잘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겠구나. 나는 어쩌면 잘하려는 것만 잘하려는 괘씸함을 품고 있었구나. 세상에 나만 잘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데.     




   다시 체스판을 꺼냈다. 피아노도, 체스도. 포기하지 말아야지. 인생은 길고 무료한 시간은 차고 넘칠 테니, 더 즐겁게 하는 법을 배워야겠다. 여러 기물 중 폰을 먼저 꺼내 체스판 위에 나열하기 시작했다. 작고 하찮아 보여도 실은 중요한 역할을 가진 폰처럼. 작고 하찮은 시간들이 미래의 나를 만들어 나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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